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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2.06 18:13 수정 : 2009.02.12 15:44

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백승종의역설

김육은 17세기의 명신이다. 그때는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라 그런지 나라꼴이 엉망이었다. 위기의 본질을 김육은 지배층의 무능으로 돌렸다. 그래서 그는 기득권층의 강력한 저항을 무릅쓰고 세법을 개정해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또한 화폐의 통용을 역설했고, 옛 달력의 오류를 고치려고 시헌력을 도입했다. 김육은 역사에 보기 드문 명재상이었다.

이런 그였지만 때로는 관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1626년(인조4) 가을만 해도 그런 일이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국방예산의 확충을 위해 각지에 호패어사라는 일종의 특임관을 파견할 계획이 논의되었다. 고심 끝에 김육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그 일을 반대했다. 어사 파견은 무엇보다도 시간낭비며 실효성이 없는 일이라고 했다. 게다가 민간이 지급할 어사의 접대비도 적지 않아 가난한 백성들만 더욱 죽어날 것이었다.(<잠곡유고> 7권) 김육은 상소문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견해를 당당히 밝히고 사직했다.

그때 그는 호패를 담당하는 호패청의 관리였다. 간쟁을 담당하는 사헌부의 관원이기도 했다. 상소문에 밝힌 그의 견해는 사헌부의 관리로서 호패사무를 비판한 것이다. 이로 인해 호패청의 상관과 동료들 보기가 불편해진 김육은 깨끗이 사직했다. 그 시절의 전문용어를 빌리면 그는 “피혐”한 것이다. 논란 중인 사건에 연루된 이는 혐의가 다 풀릴 때까지 관직을 떠나는 것이 피혐이었다. 이것은 명분과 의리가 중시되던 조선시대의 아름다운 풍습이었다.

며칠 전, 국회에서 롯데월드의 비행안전 문제로 공청회가 열렸다. 애초 참석이 예정되었던 전직 장성들이 갑자기 불참했다. 국방부와 공군의 압력이 작용했다고 한다. 줏대도 용기도 없는 선배 장군들을 현직에 있는 힘센 후배들이 마구 흔들어댔다. 국회도 무시당했다. 장군들의 침묵은 김육의 피혐과는 유가 다르다. 비겁한 지금 세상에는 나라를 위해 제 할 말 다하고 물러나는 시원스러움이 없다.

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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