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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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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의역설
알프레드 노벨은 다재다능한 사업가였다. 그는 6개 국어에 능통했고 시인으로서 재능을 보이기도 했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갑부가 되었고 연인도 있었지만,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말년에 그는 인류 복지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상금으로 주라며 3100만크로나를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 쾌척했다. 이는 지금의 미국 돈 2억5000만달러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노벨이 막대한 유산을 상금으로 내놓게 된 데는 한 여성의 역할이 컸다 한다. 한때 비서이자 연인이었던 베르타 폰 주트너(미혼 시절 성은 킨스키)가 바로 그 여성이다. 그는 소설가로도 유명한데 전쟁반대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1905년,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노벨상은 1901년부터 운영되기 시작해 올해까지 약 830명의 수상자가 나왔다. 역대 수상자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큰 영광을 누린 이를 하나만 손꼽으라면,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과학자 마리 퀴리를 말해야 옳을 것이다. “퀴리 부인”으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그는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연거푸 수상해 세상을 놀라게 한 재원이었다. 그중에서도 화학상은 퀴리 부부가 공동으로 수상했다. 부인의 장녀 이렌(남편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도 나중에 부부가 노벨 화학상을 함께 받음으로써 모녀 2대가 연속해서 부부 공동으로 노벨상을 받은 진기록이 작성되었다. 물론 노벨상에도 내막을 알고 보면 어두운 구석이 있다. 제국주의와 백인우월주의의 입김 아래 한동안 그 수상자가 구미지역에 한정되었다. 그 바람에 무저항운동으로 인류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한 인도의 간디는 무려 다섯 번이나 노벨 평화상 후보가 되었지만 끝내 이 상을 타지 못했다. 노벨상 운영이 불공정하다는 비판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번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자 비난이 쏟아졌다. 심지어 미국의 어느 신문은 이 결정이 “미래의 일에 대해 주는 첫 번째 상”이라며 노골적으로 비꼬았다. 백승종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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