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1.27 18:45
수정 : 2012.03.28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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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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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이탈리아의 학예는 메디치가의 재정적 후원에 힘입어 부흥했다. 메디치가의 ‘위대한 로렌초’는 화가 미켈란젤로를 가족처럼 여겨 자주 점심을 함께 했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메디치가의 줄리앙>, <최후의 심판> 등 르네상스 최고의 걸작으로 응답했다.
과연 학문과 예술은 후원이 있을 때만 크게 발전한다. 조선 초기 한글이 창제되고 도량형과 천문학, 인쇄술과 음악 등이 발전한 것은 세종이라는 특별한 후원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서양 근대의 계몽사상가 루소도 여러 독지가의 신세를 졌다. 한때 그는 데피네 부인의 도움을 받았는데, 부인의 시누이를 연모한 죄로 후원이 끊기기도 했다. 이처럼 후원자는 피후원자를 사적으로 지배하기 일쑤였다. 개인과 기업의 후원은 오늘날에도 계속되지만 대개는 그들 자신의 사적 이익을 꾀하는 경향이 있다.
그 위험성을 간파한 현대사회에서는 국가가 학예와 기술진흥의 사명을 맡고 있다. 20세기 이래 선진 각국은 상설기구를 설립해놓고, 엄격한 심사를 통해 공익에 이바지할 과제를 선정해 연구비를 지원한다. 그 선정과정에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고 영국과 프랑스 등 각국 정부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들에게는 1920년에 창립된 독일연구진흥재단의 역사가 반면교사 구실을 한 것 같다.
문제의 재단은 나치시대에 큰 굴절을 겪었다. 당시 재단의 수뇌부는 정권에 영합해 국수주의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결과적으로 연구비 배당도 편파적이었다. 가령 1934년에는 폴란드 지식인과 유대인 학살에 관한 연구비가 12억 라이히마르크나 배정되었다. 이런 위험천만한 사태는 히틀러 정권이 패망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1949년 독일학술진흥재단(DFG)의 재창립과 더불어 과거사는 극복되었다. 최근 정부 산하기관인 한국연구재단이 현 정권에 비판적인 학자들을 연구비 지원에서 제외한 것 같은 정황이 포착되었다. 역사의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백승종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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