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2.04 18:32
수정 : 2009.12.04 18:32
|
백승종 역사학자
|
그 역사가 길다. 원나라 부마국이던 시절, 고려 공민왕은 저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최영 장군더러 장사성(張士誠)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조력하라고 했다. 최영은 강소성에서만도 30회쯤 싸웠다. 격전지 회안성(淮安城) 전투에서는 고려군이 적들에게 완전 포위됐고, 최영 장군도 적의 창에 찔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하지만 고려군은 마지막까지 싸워 적군을 퇴각시켰다.
당시 최영의 관심사는 대륙의 정세를 파악하는 거였다. 이것은 그를 원나라로 보낸 공민왕의 뜻이기도 했다. 왕은 대륙의 정치적 풍향을 옳게 가늠하는 것이야말로 왕실의 안위가 달린 중대사라고 믿었다. 최영이 귀국한 뒤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펴나갔다. 그는 원나라의 국운이 쇠퇴하고 있다는 점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고려에 뒤 이은 조선왕조 역시 처음에는 국익 위주로 파병문제를 결정했다. 매사에 실리를 추구한 결과, 역대 조정은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도 상이한 결정을 내리기 일쑤였다. 가령 명나라가 몽골 원정에 동참하기를 요구해오자 세종 때는 이 요구를 단박에 물리쳤다. 하지만 세조 때는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여 파병을 단행했다. 그 뒤 성종 때는 조정이 입장을 바꿔 최소한의 병력을 파견해 생색만 낼 뿐, 실제 전투에서는 소극적으로 대응하게 했다.
그러나 16세기가 되자 조선왕조의 해외파병 정책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역사학자 계승범(고려대 연구교수)은 이를 가리켜 맹목적 사대주의의 대두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명나라와 동맹을 강화하기만 하면 국익은 저절로 보장된다는 식의 안이한 믿음이 조정을 지배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청나라의 조선 침략이었다. 얼마 전 미국은 아프간에 병력을 증파하기로 결정했다. 그 소식이 알려지기가 무섭게 프랑스 등은 반대 입장을 선언했다. 이런 와중에 정부는 아프간 증파를 외치고 있다. 이렇게 서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우선은 국익의 대차대조표라도 차근차근 만들어 볼 일이다.
백승종 역사학자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