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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1.29 18:18 수정 : 2010.01.29 18:18

백승종 역사학자

김병로(1887~1964)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었다. 그는 1919년 경성지방법원 변호사가 된 이후, 3·1 운동, 105인 사건, 6·10 만세 등 주요 항일운동사건의 무료 변론을 맡았고, 독립투사 가족들도 돌보았다. 1932년, 군국주의의 횡포로 시국사건의 변론조차 불가능하게 되자,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은둔생활을 했다. 그는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일제의 배급도 일체 거절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대법원장이 되어 재임 9년 3개월 동안 사법권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경찰이 정권의 비호 아래 반민특위를 습격하자 정면으로 맞선 일로, 이승만 대통령이 사표를 종용했으나 굴하지 않았다. 1956년 이승만이 국회연설에서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 어디서도 유례가 없는 막강한 권리를 행사한다며 사법부를 질타하자 “이의 있으면 항소하라”고 응수한 일화는 유명하다.

1950년 국회 프락치 사건 때도 정부여당이 ‘프락치’로 지목한 국회의원 13명에 대해 중형을 선고하지 않았다. 그 밖에도 정치사범에 대한 잇따른 무죄 선고로 그는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특히 1952년 부산정치파동 직후, 집권자가 법의 정신을 왜곡하고 국민의사를 빙자해 입법기관을 강박하는 것은 민주법치국가에서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사법권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성은 어떤 경우라도 양보 될 수 없는 절대명제임을 언명한 것이다. 김병로는 당연히 ‘사사오입’ 개헌도 반대했다. “부정을 하기보다 차라리 굶어 죽는 편이 영광”이라는 평소 소신을 지켜 그 집안에는 제대로 된 장롱 하나도 없었다.

삼권분립은 1776년 미국독립선언에 “견제와 균형”이란 명목으로 명시된 이래 근대헌법의 필수요소다. 최근 우리법연구회에 사법권의 독립을 저해한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그러나 사태의 본질은 정치권력의 지나친 간섭이다. 대법원장은 이 위기를 과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백승종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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