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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2.26 18:22 수정 : 2010.02.26 18:22

백승종 역사학자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1926년 간행된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에 나오는 시구다.

‘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제목이 붙은 이 시의 내용처럼, 만해는 이민족의 지배라는 객관적 사실에 수긍할 수 없어 자신의 이름을 총독부가 만든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그로 인해 나이 오십 넘어 얻은 만해의 외딸은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호적이 없었기에, 법에 의한 신변 보호 역시 불가능했다. 식민지 말기에는 일제가 중국 및 미국과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식량과 생활필수품이 부족해 모두 배급에 의존해 생계를 이었다. 호적 없는 만해에게는 배급마저도 거부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불이익은 실상 만해가 자청한 것이었다.

그는 열혈지사였다. 청년 만해는 1894년, 향리인 충청도 홍성에서 갑오동학농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을미의병에도 참가해 국권회복을 시도했으나, 그 역시 실패로 돌아가자 마침내 산사에 몸을 맡겼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독립의 여망을 안고 중국과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불교계 대표로 참가했다. 처음에 독립선언서의 이름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으나, 만해의 주장으로 논의가 귀일되었다. 승속 간에 걸림이 없던 그는 좌우로 분열된 독립운동전선의 통일을 위해 신간회에도 참여했으나, 끝내 해방을 보지 못하고 입적하였다.

다른 무엇이기에 앞서 만해는 선승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역사의 파노라마를 티끌세상의 한낱 부질없는 미몽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다 해도, 그는 시대의 부름에 따라 늘 백척간두에 늠름하게 서 있었다. 3·1절을 맞아 새삼 만해가 그립다.

백승종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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