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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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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부터 중국에 있던 것이고, 한국에서도 이미 신라 진성여왕 때 출현했다. 특히 조선후기에 널리 유행했다. 그때는 종이나 헝겊에 쓴 글을 관청이나 시장처럼 인파가 북적이는 곳에 몰래 붙이거나 걸어놓고 달아나는 사람이 많았다. 벽에 붙여두면 벽서, 기둥 같은 데 걸어두면 괘서라 했다. 집권층을 호되게 비난하는 내용이 많아 중범죄로 간주되었다. 서양에도 일종의 벽서가 있었다. 가령 20세기 소련 등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벽서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수단이었다. 멀리서도 읽을 수 있게 큰 글씨로 썼대서, 현대 중국인들은 이를 대자보라 부른다. 대자보는 이른바 문화혁명 때부터 중국 정치에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1966년 5월25일 베이징대학에 나붙은 대자보는 대학의 운영권이 아직도 반동분자들의 수중에 있다고 맹비난했다.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은 문제의 대자보를 각종 매체를 통해 널리 보도함으로써 대숙청의 회오리가 일어났다. 그해 11월에는 또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 “실권파”를 공격하는 대자보가 나와, 결국 그들을 추락시켰다. 1975년에 개정된 중국 헌법은 대자보를 작성할 권리를 인민의 4대 권리 중 하나로 명시했다. 훗날 중국에서 민주화투쟁이 전개될 때도 대자보는 큰 역할을 했다. “민주의 벽” 운동 때 웨이징성은 ‘5번째 근대화는 민주주의’라는 대자보를 작성해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다. 애초 권력층 내부의 투쟁수단으로 쓰이던 대자보가 마침내 체제비판의 무기로 변화된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한국의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서도 대자보의 역할은 눈부셨다. 1980년대 전국의 대학과 공장 어디서나 대자보의 물결이 범람했다. 그것이 결국 군사독재의 철옹성을 무너뜨리는 기폭제 노릇을 했다. 최근 한 대학생이 써 붙인 대자보가 화제를 끈다. 국가와 대학이 자본과 대기업에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하청업체로 전락했다는 그의 지적이 날카롭다. 백승종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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