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8.27 20:33
수정 : 2010.08.27 20:33
|
백승종 역사학자
|
“길짐승 날짐승도 구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이 강산 속절없이 망했구나./ 가을 등잔불 아래 책장 덮고 지난 일 돌아보노라./ 인간 세상 글 읽는 선비 노릇 차마 못 하겠구나./ 나라 위해 아무 일 못한 나 같은 사람이야/ 살신성인하련다마는 이것이 과연 충(忠)일는지.”
매천이 남긴 ‘절명시’의 한 대목이다. 나라가 망하자 그는 아편 한 덩어리를 삼키고 세상을 버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매천은 의병을 일으키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과연 일제 통치는 가혹해 말년에는 창씨개명까지 강요되었다. 그러자 매천의 아우 황원(黃瑗) 역시 자결했다. 조국은 매천 형제에게 미관말직도 맡기지 않았지만, 그들이 짊어진 의리는 그토록 무거웠다.
매천은 본래 전라도 광양 사람으로 소싯적부터 문명이 높았다. 이건창, 김택영과 사귀었는데 사람들은 그들 셋을 ‘삼재’(三才)라 일컬었다. 매천은 생원시에 장원까지 했지만 부패한 세상이 싫어 지리산 아래 숨어 독서와 강학을 자임했다.
그러나 매천은 늘 깨어 있었다. 고종 초부터 조선 망국까지 무려 47년간 그는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을 기술했다. 직접 보고 들은 것만 아니라 서책과 신문기사와 소문 등을 망라해 차분히 당대 역사를 써내려갔다. 매천은 무능하고 부패한 왕실과 조정대신들의 비행을 낱낱이 파헤쳤다. 매천은 그들을 미친 “도깨비들”이라 했고, 도깨비놀음에 결국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했다.
매천은 망한 나라의 왕이 불쌍해 독약을 삼킨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선비로 살게 만든 조선의 문화, 그 도덕과 가치관에 충실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비보를 접한 <경남일보> 주필 장지연은 절명시를 게재해 필화를 입었다. 그 이듬해 영남과 호남의 선비들이 주머니를 털어 <매천집>을 펴냈다. 영호남이라면 대립만 일삼는 줄로 잘못들 알고 있지만, 그것은 연줄로 벼슬을 거래하는 현대의 도깨비들이 연출하는 비극이다.
백승종 역사학자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