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9.10 19:57
수정 : 2010.09.10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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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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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때 외척 윤원형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참다못한 왕은 그를 견제하려고 이양을 밀었다. 이양은 왕의 장인 심강의 처남이었다. 명종의 총애로 이양이 벼락출세하자 그 아들 이정빈도 덩달아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이정빈은 평소 학문이 부족하다는 세평이 자자했지만, 벼슬 중에 노른자위로 통하던 이조전랑이 되었다.
얼마 안 있어 그 아버지 이양이 이조판서로 낙점되었다. 아들은 꼼짝없이 상피법에 걸려 이조를 떠나게 되었다. 이정빈은 자신의 절친한 벗 유영길을 후임으로 추천했다. 그러자 이조의 동료 박소립과 윤두수가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화가 치민 이정빈은 아버지를 움직여 두 사람을 조정에서 몰아냈다. <대동야승>에 나오는 실화다.
이양 부자처럼 권세를 오로지하던 사람들조차 지켜야만 되었던 것이 조선의 상피법이었다. 과거시험의 시험관과 응시자도 그렇고, 같은 도에 파견된 관찰사와 수령들에게도 그 법이 적용되었다. 가까운 친인척들이 이조와 병조에 나란히 배속되는 것까지도 용납되지 않았다. 심지어 형제가 관찰사 자리를 주고받는 것조차 법으로 금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상피의 범위는 너무 넓었다. 부자·형제는 물론, 아저씨와 조카사위조차 법의 구애를 받았다. 사촌형제나 내외종형제는 서로 벼슬을 천거하지 못하게 막았다. 정조는 이런 상피법이 지나치다며 규제를 많이 풀었다. 그 아들 순조 때부터는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렸다. 어쩌면 상피법의 완화가 세도정치를 부채질했는지도 모른다.
최근에 드러난 외교통상부의 특채비리를 보다 못한 시민들은 차라리 상피법을 복구하자고 말하고픈 심정이다. 옛날에는 물론 음서라는 것도 있었다. 신분 차별이 당연시되던 시대의 폐습이었다. 시험 말고 능력 위주로 사람 뽑는 것을 무조건 반대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부도덕한 지도층에게 맡기면 나라 망친다. 우리 정부라면 어떤가. 고시 폐지 같은 말, 아예 입도 뻥긋 말라.
백승종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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