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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0.01 20:26 수정 : 2010.10.01 20:26

백승종 역사학자

서울도 홍수피해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중종 5년(1510년) 7월 큰비가 내리자 서울 도심은 온통 깊은 물속에 잠겼다. 시냇가에 줄지어 선 민가들도 급류에 떠내려갔다. 곳곳에 놓인 돌다리도 힘없이 무너졌다. 이렇게 장맛비가 계속되면 나라에서는 고사를 지냈다. 가령 숙종 21년(1695년) 서울에 늦장마가 들자 4대문에서 영제를 지냈으니, 이는 비가 멎기를 바라는 기청제였다.

서울의 물난리는 정치적 상징성도 높았다. 효종 5년(1654년) 늦여름 큰물로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대궐 안의 도랑물까지 넘쳐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판국이었다. 그 기회를 빌려 황해감사 김홍욱은 ‘강빈의 옥사’를 문제 삼았다. 강빈은 소현세자빈으로 세자와 함께 심양에서 볼모생활을 하다 귀국했다. 그런데 환궁한 지 얼마 안 되어 세자는 부왕(인조)과 불화하더니 의문의 변사체가 되었다. 왕통은 아우 봉림대군(효종)에게 넘어갔고, 강빈 일족에게는 인조를 저주했다는 혐의가 씌워져 극형이 가해졌다. 의혹투성이 사건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거론하지 못했는데, 자연재해를 빌미로 김홍욱이 진상규명을 요구한 것이다. 그의 이론적 토대는 정치적 과오에 대한 하늘의 응답은 천재이변으로 나타난다는 전통사상이었다. 효종은 김홍욱을 죽였으나, 나중에 후회했다. 그 뒤 숙종은 영의정 김창집의 건의에 따라 강빈과 그 일족도 모두 사면했다.

서울의 대홍수를 예방하려는 노력도 적지 않았다. 영조 49년(1773년) 좌의정 김상철은 장마가 오기 전에 미리 청계천을 준설하자고 했다. 그는 공사비로 쓰일 좁쌀 1만석의 조달방안까지도 강구했다.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웠던 고종 때도 장마철에 대비한 예비조처가 신중히 검토되었다. 지금 서울시는 어떤가. 큰맘 먹고 만든 광화문 광장이 폭우 하나 못 견디고 광화문 계곡으로 돌변했다. 그 성난 물길이 부디 4대강의 어두운 앞날에 대한 자연의 경고가 아니기를 바란다.

백승종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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