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11.19 20:50
수정 : 2010.11.19 20:50
|
백승종 역사학자
|
1865년(고종 2년) 9월, 재건중인 경복궁내 주요 건물의 현판을 누가 쓸지가 결정되었다.(고종실록) 궐내 전각은 학덕 높은 여러 문신과 고종의 친형 이재면 등 왕실 지친이나 외척들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바깥세상으로 통하는 궁궐 출입문 현판은 무신들 차지가 되었다. ‘칼잡이’의 글씨에는 귀신과 도적을 쫓는 힘이 실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현판 글씨의 벽사(<8F9F>邪)를 웅변하는 설화가 있다. 지리산 천은사에서는 구렁이를 잘못 죽인 까닭에 우물이 바짝 마르고 화재가 연달았단다. 보다못한 명필 이광사가 물길처럼 유려한 필체로 큼직하게 현판을 써주었다. 그러자 재앙은 씻은 듯이 물러갔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용맹강직한 무신의 힘찬 글씨가 대궐을 지켜주리란 믿음도 그럴싸했다.
경복궁의 남쪽 정문인 광화문 현판을 누가 쓸 것인가는 큰 관심거리였다. 그것은 결국 훈련대장 임태영의 글씨로 낙착되었다. 임태영이라면 이미 철종 때 포도대장, 금위대장, 어영대장까지 두루 역임한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다. 1859년에는 천주교도를 심하게 박해해 척사(斥邪)를 상징하는 무사로 손꼽혔다. 이런 그가 마침 정예병의 집합체인 훈련도감의 총수가 되었다. 그는 경복궁 중건 사업에도 열성이어서 영건도감 고위간부를 겸하게 되었는데, 휘하의 사졸을 거느리고 공사장 경비를 잘해 표범 가죽까지 하사받았다.(승정원일기)
금년 8월, 우여곡절 끝에 그가 쓴 광화문 현판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겨우 두어달 만에 금이 쫙 갔다. 최근에는 현판 목재도 대목수의 주장처럼 금강송이 아니라 일반 소나무라는 의혹까지 제기되는 판이다. 이 모두 정부가 복구 일정을 무리하게 앞당겨 8·15 기념행사와 ‘G20 정상회의’에 맞추려 허둥댔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이것도 기회라고 임태영의 현판일랑 내팽개치고, 독재자 박정희의 한글 현판으로 대체하라는 요구가 또 불쑥 터져 나온다. 아, 웃지도 못할 광화문이여!
백승종 역사학자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