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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2.11 19:57 수정 : 2011.02.11 19:57

백승종 역사학자

“이전의 나는 아랍인이 아니었다. 아랍주의를 신봉하지도 않았다. 누군가 내게 아랍의 이익에 관해 주장할 때면 나는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아랍의 가능성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나세르, 1953년)

가말 압델 나세르(1918~1970)는 범아랍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아랍의 자존심, 아랍민족의 자유를 상징하는 20세기의 위대한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군인이었던 그는 1952년 동료들과 함께 파루크 왕을 축출하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범아랍주의 또는 나세르주의라 불리는 그의 아랍 민족주의는 주변국으로 퍼져나갔다. 아랍세계는 열강의 분열정책으로 인해 사분오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세르는 서구 제국주의와 싸워 아랍의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랍의 석유자원 역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범아랍주의에는 지역이기주의의 문제가 없지 않지만, 그때 그들의 처지에서는 불가피한 점이 있었다.

아랍 각국에서 군주정치를 종식시키고 통일된 아랍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 나세르의 꿈이었다. 이에 공감한 시리아는 이집트와의 통합을 바랐고, 그래서 통일아랍공화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진정한 통합의 길은 멀고도 험해 그들의 연합은 겨우 수년 만에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세르의 범아랍주의는 아직도 사막 어딘가에 살아 있다.

냉전의 회오리에서도 그는 비동맹 독자노선을 추구했다. 서방세계의 거센 압박에 굴하지 않으려고, 동유럽 진영과 전략적 연대를 꾀하기도 했다. 언제 어디서든 그의 관심사는 독립과 자활이었다.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성난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 편에 서 이집트를 공격해 왔고, 나세르는 소련과 미국을 제 편으로 끌어들였다. 나세르의 길에서 멀어진 사다트와 무바라크는 친미 노선에 매달린 값싼 독재자들이었다.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이집트에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일까.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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