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5.06 19:36
수정 : 2011.05.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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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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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란 낱말은 소파 방정환 선생이 만들었다고 한다. 1920년 8월, 소파는 천도교 잡지 <개벽> 제3호에 ‘어린이 노래’란 시를 발표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보다 두 달 앞서 박달성은 이미 어린이란 말을 썼다. 그는 <개벽> 창간호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될 사회문제라며 어린이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파헤쳤다. 신조어 어린이의 창시자가 과연 누구였는지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천도교 쪽에서 나온 것만은 틀림없다.
천도교에서는 1922년 5월1일을 ‘어린이의 날’로 선포하고, 서울 시내에 다량의 인쇄물을 돌렸다. 그 이듬해 2월에는 500명의 어린이를 선발해,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했다. <어린이>라는 잡지도 창간했다. 소파는 이 잡지의 중심인물이었다.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 잡지사는 1923년 5월1일을 기하여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계몽운동을 펼쳤다. “이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 그들에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주시오.” 이런 내용을 담은 20만장의 전단이 뿌려졌다. 어린이 문제에 관한 천도교 쪽의 관심은 지대했다.
소파를 비롯한 천도교 인사들은 어린이 운동이야말로 후천개벽을 실천하는 올바른 길이라고 믿었다. 이상세계인 후천개벽은 어떤 속박도 없는 자유로운 삶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20세기 초, 천도교 인사들의 눈에 비친 어린이들의 삶은, 여성 및 노동 빈민과 마찬가지로 가장 억눌린 것이었다. 어린이의 가냘픈 어깨 위에는 육체노동의 무거운 멍에가 씌워져 있었고, 그들의 권익을 어른들이 늘 유린하였다. 하늘이 허락하신 권리를 어린이들에게도 되돌려주자! 이런 목적을 뚜렷이 하기 위해, 천도교에서는 피압박 계층의 요구가 분출되는 노동절을 어린이날로 삼았다. 처음에는 이처럼 거룩한 사회혁신의 의지가 불타올랐건마는, 그 푸름이 여지없이 빛바랜 오늘날 이날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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