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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6.10 19:17 수정 : 2011.06.10 19:17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광해군 3년(1610) 이황과 이언적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여론이 일어났다. 그러나 집권당인 북인의 영수 정인홍은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이황 등을 헐뜯기까지 했다. 분노한 성균관 유생들은 그의 이름을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에서 지워버렸다. 박여량 등 정인홍 쪽 사람들은 왕을 졸라 유생 대표의 벼슬길을 영구히 막아버렸다. 이에 반발한 성균관 유생들은 권당(捲堂), 즉 동맹휴학으로 맞받았다.

정국이 경색되자 이항복이 나섰다. 노재상은 차자를 올려 사태의 근본 원인을 따졌다. “논리로 선비들을 설득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힘으로 그들을 억누르는 처사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항복의 주장은 계속된다. 선비, 즉 지식인은 아무런 형상도 없는 도를 추구한다. 얼핏 보기에는 그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엉뚱한 일 같아 보이지만, 세상에 선비만큼 중요한 존재가 없다. 위기에 빠진 세상을 건지는 진정한 힘은 일용할 양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도의 실천에서 나온다.

권력자가 힘으로 선비를 억압한다면, 잠깐 동안은 세상을 제 마음대로 장악할 수 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세상은 더욱 어지러워진다. 만일 이런 억압정치가 계속된다면, 나라는 곧 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면서 이항복은 권당 사태의 주된 책임을 정인홍에게 돌렸다. 해묵은 사적 감정 때문에 그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비판했다. 마침내 광해군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은 여러 차례 권당을 결행했다. 그들이 늘 옳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권당의 태반은 지배층의 실정에 대한 항거였다. 그것은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일종의 촛불 역할을 해낸 것이다. 유생들의 뜻을 함부로 꺾으려 한 권세가들은 역사가들의 호된 질책을 피할 수 없다. 요즘 반값 등록금 문제로 대학생들이 모여앉아 다시 촛불을 켜기 시작했다. 이항복처럼 꼿꼿한 어르신이 안 계신 것은 유감이지만, 용감한 시민들이 많아서 든든하다.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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