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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0.17 19:21 수정 : 2011.10.17 19:21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서울의 안골(내곡)은 대모산 자락을 따라 안쪽 깊숙이 들어앉았대서 생긴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수목이 워낙 울창해 호랑이가 출몰할 정도였다. 오랫동안 이곳에는 감히 인가가 들어서지 못했다. 사후일망정 태종 이방원과 그 정비 원경왕후 민씨가 안골에 버티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명당 중 명당이라는 헌릉은 태종 내외분의 유택이다.

헌릉을 안골로 모신 이는 세종이었다. 꼼꼼하기 짝이 없던 세종은 헌릉 비문에 부왕의 즉위 날짜가 잘못 기록된 것을 알고 바로잡았다. 원경왕후가 명나라 황제에게서 선물받은 횟수가 틀리게 기재된 것까지도 고쳤다. 효심이 지극한 세종은 헌릉을 정성껏 보살폈다. 그러자 당대 명풍수 최양선과 이양달은 저마다 온갖 풍수지식을 총동원하여 충성경쟁을 벌였다.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준다면, 대모산 아래 백성들은 아마 하루도 쉴 틈이 없었을 것이다. 세종은 백성을 위해 풍수의 말을 일부러 흘려들었다.

어느 해 봄, 세종은 헌릉을 몸소 찾았다. 능행길이 워낙 좁은 관계로, 왕의 행차는 부득불 길가의 보리밭을 침범하였다. 호조에서는 밭 1복에 3되의 콩을 보상해주면 족하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왕은 백성 편이었다. 밭 1복의 생산량은 3말쯤으로 추산되므로, 최소한 그 절반은 보상해주어야 된다는 의견이었다. 또 세종은 왕릉의 주산에서 갈라져 나온 길을 백성들이 못 다니게 하는 풍습도 혁파했다. 백성이 생업을 포기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세종은 무슨 일에서든 백성들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했다.

최근 대통령의 젊은 아들이 내곡동에 많은 땅을 사들였다고 한다. 대통령이 퇴임한 뒤에 들어가 살 곳이라는데, 수상한 점이 결코 한둘은 아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마을로 퇴거하자 아방궁 타령을 하던 사람들이 누구인가. 그들이 곧 현 정권의 실세임을 고려하면 어안이 벙벙하다. 내곡동에 들어가 여생을 편히 보내려거든 세종처럼 올바르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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