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1.09 19:32
수정 : 2012.01.09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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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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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혼자 한 일은 없습니다. 거듭 말합니다만, 일본말로 말하자면 고즈카이(小使)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949년 고문 기술자 김태석이 반민특위 공판에서 늘어놓은 변명이다. 반박이 쏟아졌다. “내가 김태석이라는 놈 때문에 폐병에 걸리고, 이렇게 폐인이 되었으니 그놈의 원수는 죽어서라도 갚아야 할 것이다. 특히 나는 경찰서에서 고 강우규 의사가 그놈한테 고문당하는 것을 보았는데, 어찌 맞았는지 혀가 세 치나 빠져나온 것을 보았다.” 누군가는 이렇게 증언했지만 김태석은 여전히 오리발을 내밀었다.
고등계 형사들은 독립운동가의 머리카락을 뽑고, 물을 먹이고, 혀를 잡아 뽑는 것이 능사였다. 특히 김태석과 노덕술 등은 이 방면의 귀재였다. 일본 형사들을 능가하는 그들에게 고문왕, 고문귀(拷問鬼), 악의 화신, 귀경부(鬼警部)라는 별명이 붙었다. 미처 그들이 반성의 시간을 갖기도 전에 해방이 도둑처럼 찾아온 것은 역사의 실수였다.
쥐구멍에라도 숨는 것이 인간적 도리였겠지만, 그들은 신생 조국의 부름을 외면하지 못했다. 모든 종류의 현실권력에 충성을 바치는 데 익숙한 전천후 애국자들이었기에, 그들은 기꺼이 한 나라를 위해 다른 나라를 버렸다. “지난 일은 다 일제가 시켜서 그랬다. 실은 남몰래 독립운동가의 목숨을 많이 살렸다. 늘 빨갱이를 잡아 죽이는 데 앞장섰다.” 제2의 안중근이란다.
이 애국자들은 조국을 위해 고문의 진가를 발휘했다. 미다스 왕이 그랬던 것처럼 기술자들의 손이 미치는 곳마다 빨갱이가 태어났다. 독재정권을 철옹성처럼 지키다 못해 그들은 아주 결딴을 냈다. 최고의 애국이다. 고문왕의 후배는 민주의 벗 김근태를 잡아다가 전기고문·물고문으로 조져댔다. 덕분에 김근태는 여러 해를 된통 앓다가 이제 고해를 벗어났다. “임금이 바뀌면 충신이 역적 되고 역적이 충신 되는 수난의 역사 속에 두 시대를 사는 죄가 이렇게 무거운 것이냐?” 질문도 참 예술이다.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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