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7.16 19:21
수정 : 2012.07.16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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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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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갈수록 더 빠른 박자의 음악을 좋아한단다. 조선시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후기가 되자 시조나 가곡은 박자가 훨씬 빨라졌다. 세상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음악도 변화를 타고 있었다.
박자가 빨라지자 정조는 질색을 하였다. 왕에게 빠름은 곧 경박함이었다. 세상이 경박해져서 음악도 빨라졌다. 이것이 그의 확신이었다. 그래서 왕은 빨라진 음악의 박자를 다시 늦추고 싶었다. “대제를 지낼 때 악공이 박자를 놓친 것이 많았다. 아홉 악장을 끝까지 연주하는 동안에도 박자가 너무 빨랐다. 놀랍고 송구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렇게 연주한다면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일득록>, 이하도 같음)
옛날처럼 음악이 느리게 연주되기를 정조는 바랐다. 비파 줄을 붉은 실로 만들어 소리를 탁하게 내고, 악기 바닥에 구멍을 뚫어서 소리를 둔하게 만드는 등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라도 중국 고대의 질박한 음악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사정이 여의치 않자 정조는 탄식하였다. “경박한 풍속을 고치려면, 우아한 음악이 우선 있어야 마땅할 텐데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음악가 기(夔) 같은 이를 얻기 어려우니, 이 일을 어찌할꼬.”
역사교과서가 가르치는 것과는 달리 정조는 보수적이었다. 왕은 변화라면 다 싫어하였다. 자연히 중국에서 도입된 신문물에 대해서도 왕은 거부감을 가졌다. 그는 신문물을 셋으로 분류하였다. 소품(小品)과 기서(奇書) 등 중국 책이 하나요, 서양의 역학과 수학책, 그리고 중국산 명품이었다. 정조는 이 모두를 배척하였다.
정조는 낡은 가치관의 수호에 매달렸다. “풍속이 나빠져 선비는 경전을 읽지 않고, 여럿이 모여도 시와 예를 토론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사는 미인과 재물과 돈뿐이다. 비루하고 속되기 짝이 없다. 지도층의 품행이 이러하니 탄식할 일이다.” 정조가 변화를 외면한 것은 유감이지만 지도층의 품행을 문제 삼은 것은 옳다. 이 정권의 도덕적 끝은 과연 어디냐.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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