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8.20 19:25
수정 : 2012.08.20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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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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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그는 새 세상 만들기에 몰두하였다. 학도병으로 중국 땅을 밟게 되자 장준하는 군복을 벗어버리고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광복군이 된 그는 김구 선생을 모시고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장준하의 일생은 독립과 자유, 민주와 통일을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를 그답게 만든 것은 <사상계>였다. 피난 중에 창간된 이 월간지는 민족통일과 민주주의, 경제발전과 신문화 창조를 추구했다. <사상계>는 항상 시민의 편에서 민족의 문제를 고민했기 때문에 독재자들의 숙적이 되고야 말았다. 잡지에 실린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1958)는 이승만 독재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김지하의 시 ‘오적’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부정과 부패를 여지없이 폭로하였다.
장준하와 <사상계> 및 민주시민의 최대 숙적은 박정희 정권이었다. 저들은 장준하를 국가원수 모독죄로 구속하였고(1966), 시민의 벗 <사상계>를 폐간하였다(1970). 그것으로도 부족해 ‘긴급조치 제1호’를 내세워 장준하를 구속하였다(1974). 끝내 굴하지 않은 장준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으로 맞섰다(1975). 재야세력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던 중 그는 결국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에서 의문의 추락사고를 당했다.
문제의 ‘공개서한’에서 장준하는 독재자에게 민주개헌 실시를 요구했다. 또 억울하게 구속된 민주인사들을 즉각 석방하고, 불신풍조와 상호배신행위를 조장하지 말며, 언론자유를 보장하라고 촉구하였다. 아울러 사회정의와 평화통일의 구현을 위해 시민의 참여를 방해 말라고 외쳤다. 그러나 박정희가 누구인가.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광복군에게 총부리를 겨눈 배신자, 남로당 군사조직책으로 암약하다가 저 하나 살자고 조직원을 팔아먹은’ 이가 아니던가. 며칠 전 장준하의 유골 검시가 이뤄졌다. 타살의 정황이 분명히 드러났다. 이제 책임의 소재를 물을 때다. 독재정권의 추종세력은 역사 앞에 사죄하라.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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