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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9.03 19:40 수정 : 2012.09.03 19:40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재봉사가 된 그는 평화시장의 노동자였다. 가난 때문에 고등공민학교조차 중퇴해야 했지만, 그의 머리와 가슴은 늘 깨어 있었다. 전태일은 살인적 노동환경에 시달리던 여공들을 돕다가 강제해고되었다. 얼마 후 평화시장으로 되돌아온 그는 ‘바보회’를 만들어 동지들과 함께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법과 유리된 열악한 노동현실을 재확인했다.(1969년) 노동운동을 했대서 그는 또다시 노동현장에서 추방되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현장으로 복귀한 그는 ‘삼동친목회’를 결성해 노동실태를 정밀조사했고, 이를 근거로 노동청에 진정서를 냈다.(1970년) 하지만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인정받으려던 그의 노력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완강한 반대에 직면했다. 분노한 전태일 등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치르려 했으나 이마저도 불가능했다. 그러자 전태일은 분신자살로 자본과 국가의 폭력에 맞섰다.(1970년 11월13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22살 청년이 남긴 마지막 말은 이것뿐이었다.

전태일의 절규는 끝나지 않았다. 굴지의 어느 재벌은 노동조합 없는 회사경영을 추구하기로 악명이 높다. 노동 3권을 부정하다니 그야말로 반국가적 범죄행위다. 그런데도 수십년째 정권의 침묵이 이어진다. 평소 이런 문제에 무심했던 여당의 대선주자가 최근 ‘전태일재단’을 찾았다. 국민통합을 내세운 그 방문이 무산되자 고집 센 그는 청계천의 전태일 동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에도 행차를 반대하는 노동자가 있었지만 그를 끌어내고 억지 헌화를 했단다. 아무리 정치적 행보라지만 도무지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 죽은 전태일보다 산 전태일부터 만나는 것이 순서다. 쌍용자동차 희생자와 용산참사 유가족을 외면하고 무얼 하겠단 말인가. 노동현장을 짓밟는 용역깡패의 폭력과 자살자가 속출하는 영구임대아파트의 비극 앞에서 전태일은 지금도 꺼이꺼이 목 놓아 운다.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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