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03 19:28
수정 : 2012.12.03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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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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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3월 박정희 일파는 장도영 예비역 중장 등 13명에게 ‘반혁명’ 혐의를 씌워 중형에 처했다. 장도영이 누구인가. 박정희에게 그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남로당 프락치 박정희를 죽음에서 구하는 데 일조했고, 현역에 복귀시키는 데도 앞장섰던 그였다. 또한 그는 박정희의 쿠데타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자, 이를 극구 변명해 주어 5·16쿠데타를 성사시켰다. 미국은 쿠데타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하였는데, 이를 만류한 사람 역시 그였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장도영을 숙청하였다.
처음에는 그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임명하는 호들갑을 떨며 우대하였다. ‘군사혁명 선포문’조차 그의 명의를 빌렸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과 국군 내부의 저항을 줄이기 위한 박정희의 기만술책이었다. 상대가 설사 자신의 은인이라 해도 박정희는 권력을 나눌 뜻이 전무했다. 그리하여 장도영에게 두 가지 죄목을 옭아맸다. 첫째, 쿠데타 전야 한강다리에 헌병 50명을 파견해 혁명군의 출동을 저지했다고 몰아붙였다. 둘째,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정한 최고회의 의장의 겸직 금지 조항을 반대한 것도 민족 배신 행위로 매도하였다. 결국 장도영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형 집행 면제를 받고 미국으로 떠나갔다.
박정희는 일생 동안 배신을 일삼았다. ‘천황’에게 혈서까지 쓰고 일본군 장교가 되었던 그. 일제가 패망하자 잽싸게 광복군에 몸을 맡겼다. 곧 국군장교로 변신하더니 남로당에 가입해 국가전복을 꾀했다. 그 사실이 들통나서 위기가 닥치자 이른바 명단을 팔아먹었다. 결국은 은인까지 해치웠다.
일제와 히틀러를 모방한 군국주의자 박정희는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무소불위에 가까웠던 그의 권력은 기실 계엄령의 총부리와 밀실의 고문에서 나왔다. 집권 18년 동안 목숨을 잃은 시민들도 많았다. 하건만 그의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고 떠벌이며 독재자를 우상화하는 작태가 여전히 되풀이된다. 박정희와 그 추종자들은 시민사회의 배신자다.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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