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8.10.24 18:19 수정 : 2008.10.24 18:38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 특강’] ②돌아온 간첩, 그 황당함에 대하여
공안기구 위해 조작사건 빈번…재일동포는 간첩죄 ‘풀코스’ 적용되기도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놓고 또 다시 이념논쟁이 불붙고 있습니다. 최근 교육과학부, 국방부, 통일부 등이 “역사 교과서가 좌향좌돼 있다”며 잇따라 교과서 수정 의견을 냈고, 한나라당 등 정치권도 이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사연구회와 한국역사교육학회 등 관련 학회와 일선 교사들은 “역사는 권력의 시녀가 아니다”며 맞서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국 근·현대사를 놓고 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한겨레> 독자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사 특강’을 시작합니다. 해방 후 한국 현대사가 전공인 한 교수는 지난 10월13일부터 <한겨레문화센터>에서 매주 월요일 특강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겨레출판>에서 강의록과 녹취록을 정리해 영상과 함께 매주 금요일 오후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한홍구의 대한민국사 특강을 1회 ‘역사의 내전: 뉴라이트와 건국절 논란’을 시작으로 모두 8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 특강’ 순서


1. 역사의 내전: 뉴라이트와 ‘건국절’ 논란
2. 돌아온 간첩, 그 황당함에 대하여
3. 대한민국은 공사 중: 토목 국가와 ‘경제성장’
4. 헌법정신과 민영화 -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묻는다
5. 괴담의 사회사 - 여고괴담에서 광우병 괴담, 독도괴담까지
6. 경찰폭력의 역사 - 일본 순사에서 백골단 부활까지
7. 경쟁 만능의 비극 - 잃어버린 교육을 찾아서
8. 촛불과 민주주의

[한홍구의 역사특강 ②] 돌아온 간첩, 그 황당함에 대하여



‘간첩시대’의 아픈 기억
두 번째 강의 주제는 간첩 이야기다. 간첩과 간첩에 대한 소문들과 함께 살아온 우리시대의 풍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간첩 또는 스파이란 창녀, 세리와 더불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다. 전쟁 중인 당사국들 간에는 서로 간첩을 파견한다. 국제법상에서 전시의 간첩 활동은 위법이 아니다. 단 걸리면 포로로 대접받지 못하고, 교전 당사국의 국내법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된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간첩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느 문학평론가는 자신이 제일 처음 배운 한글이 “방공방첩”이라고 말했다. 한 글자에 1미터가 넘는 담벼락에 씌어진 그 단어. 그렇게 우리는 간첩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간첩을 잡아야 한다는, 일상화된 공포 속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진짜 간첩의 시대
실제 한국 전쟁 직후부터 남과 북은 많은 수의 간첩을 서로 보냈다. 자료에 의하면 남측의 보낸 북파 공작원은 1만 명 수준이고, 북측이 보낸 남파 간첩 중 최근까지 적발된 수는 4,495명이다. (남의 북파 간첩은 보낸 숫자이고, 북의 남파 간첩은 적발된 수이기 때문에 단순비교는 곤란하다) 남파 간첩 가운데 상당수가 50년대에서 60년대 말에 적발된다. 그러다 72년 7·4 남북 공동 성명 이후 간첩이 급격히 줄어든다. 그런데 많은 수의 간첩이 내려오던 5~60년대를 거치며 늘어난 남쪽의 공안 기구는 간첩의 수가 격감해도 그대로 유지된다.

간첩이 필요해지다
이제 남한 내의 비대해진 공안 기구에 의해 간첩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Made in North Korea’가 아니라 ‘Made in South Korea 간첩들’. 납북 어부가 송환되어서는 간첩이 되고, 월북자·행불자 가족과 연계된 간첩 사건들이 빈번해진다. 특히 재일동포들의 경우에는 간첩죄가 풀코스로 적용될 여지가 많았다. 70년대 이후 간첩으로 적발된 1200여 명 가운데 사살된 사람을 제외한 천 명 중 진짜 간첩들은 몇 명이나 될까? 아마 북쪽에서 보낸 원단 간첩은 50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재일동포 중 간첩의 사명을 띠고 한국에 들어온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다만 그 천 명 중 대부분이 간첩으로서 함량이 미달된 사람들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제시한 국가 기밀들의 증거를 보면, 좀더 확실해진다. “경부고속도로는 4차선이다” “자장면은 맛있다”라는 얘기들이 간첩 행위로 취득한 기밀 내용이라는 것이고, 앞자리에 앉은 해병대 출신 예비역에게 “해병대는 뭐 하는 데에요?”라고 물었던 아주머니에게 간첩죄가 적용된다.

조작과 사법부
조작 간첩사건의 배후에는 소위 ‘기술자’들의 ‘고문(拷問)’이 큰 역할을 했다. 그 유명한 이근안이 담당한 간첩사건만도 세 건이다. 전두환 시대의 제5공화국 헌법에도 ‘고문 및 가혹행위에 의한 자백은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조항이 분명 명시되어 있다. 그럼에도 고문과 불법 구금에 의한 간첩 조작사건들이 횡횡했다. 여기서 수사기관의 조작수사를 바탕으로 최종적으로 간첩을 확정 짓는 기관인 대한민국 사법부의 무능과 방기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혹시 ‘촛불 간첩단’?
우리나라 정신과에서만 발견된 독특한 상담 사례가 있다. “중앙정보부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MBC 9시 뉴스에 난입해 “내 귀에 도청 장치가 달려 있다”고 소리친 사람도 있었다. 슬며시 웃으며 추억할 옛 이야기라고만 여겼다. 우리 가까운 주변에 간첩이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며, 간첩을 잡아야 한다는 억압된 분위기 아래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던 정신 병리학적 공포 사회는 스쳐 지나간 과거의 역사인 줄로만 알았다. 우리 자식들을 더 이상 그런 사회에서 살게 하지 않을 권리가 민주 시민의 책임이다. 그런데 지금 촛불의 배후가 누구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촛불 간첩단 사건이 일어날 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설혹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힘을 합쳐 의연하게 대처해 나가시길….

다음 번 주제는 토목 국가와 한국의 부동산 문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잘 살아보세”라는 욕망의 정치가 우리 삶을 어떻게 무장해제시켰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볼 예정이다.

정리 <한겨레출판> 편집부 박상준 laughter@hanibook.co.kr
영상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 질의응답

여러분 질문을 받기 전에 먼저 제가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 중에 ‘정보원이 되고 싶다’ ‘007 요원이 되고 싶다’ ‘스파이가 되고 싶다’는 아이는 봤지만, ‘간첩이 되고 싶다’는 애들은 못봤습니다. 왜 그럴까요? (웃음)

Q. 북파 간첩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습니다
A. 사실 북파 간첩에 대해서는 제 전공이 아니라 잘 모릅니다.

다만 지금 북파 공작원이라고 데모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훈련만 받은 분들입니다. 아마도 북한 갔다 온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북파 공작원 중에는 옛날 KLO 부대 출신 등 실제 북에 다녀오신 분들도 있겠지만 생존해 계신다고 해도 나이가 굉장히 많을 겁니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선 끊어진 북파 공작원들도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전향 장기수를 북송할 때 선 끊어진 간첩이나 억류된 사람들을 교환하자는 얘기도 나오긴 했는데, 남쪽에서 정식으로 그것을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분들을 데려와 체제 선전이나 체제 유지에 써먹을 가치가 없었는지, 혹은 선 끊어진 북파 공작원들의 생사 확인이 안됐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북파 공작원 중 우리 역사에 남을 만한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인데요. 74년도에 인혁당 관련자 8명을 무고하게 사형시켰습니다. 그때 유신 정권은 “인혁당이 10년 전 간첩이 조직한 지하 정당이자 비밀 결사이다. 그게 계속 암약하고 있다가 이번에 움직여서 이번에 적발했다”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1차 인혁당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 간첩의 실체를 알아냈습니다. 그 간첩이 인혁당 창립대회로 추정되는 모임에서 사회를 봤는데, 그건 분명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 간첩이 남파 간첩이 아니라 북파 간첩이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둔갑이 됐냐면 나중에 이 사람이 미군 정보 기관에 의해 북에 침투했습니다. 그런데 선이 끊겼어요. 후일담에 의하면 북쪽에서 이상하다고 여겨서 탄광으로 쫓겨 갔다는 얘기가 있어요. 남쪽에 내려오지 못한 것이죠. 그렇게 사라진 사람을 남파 간첩으로 둔갑시켜 2차 인혁당 사건을 일으킬 때, 간첩이 조직한 지하조직, 간첩에게 지령을 받고 조직된 지하조직,이라고 선전을 한 것이죠. 얼마나 그림이 그럴 듯합니까? 그렇게 만든 것이죠.

Q.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 분들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A. 그분들은 잘 지내시는 듯합니다. 결혼도 하시고, 아이 낳으신 분도 있고, 그쪽에서 영웅 대접을 받으면서 좋은 환경에서 잘 지내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몇 분은 돌아가셨지만, 80대 중반 노령임에도 건강하게들 잘 살고 계신 듯합니다. 그분들 이야기를 담은 <송환>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북송 후 뒷소식보다 남쪽에서의 이야기가 주로 담겨 있지만 그 영화를 보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Q. 신영복 교수님이 통혁당 사건의 관련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 통혁당 사건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A. 제가 선생님과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고 해서, 정년 퇴임 무렵에 긴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한겨레21>과 작년 퇴임 기념 논문집에 실었는데요. 신영복 선생님은 통혁당 관련자로 알려져 있지만, 굉장히 억울해 하시는 것이 뭐냐면 ‘통혁당’이라는 이름을 중앙정보부에서 수사 받을 때 처음 들었다고 합니다. 통혁당이라는 조직의 실체가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 관련자가 몇 명 있었습니다. 다만 신영복 선생님은 통혁당과는 별도의 ‘민족 해방 동맹’이라는, 학생들을 위한 조직을 만들었고, 그 조직의 핵심 간부였습니다. 실제 통혁당 당원은 아니었고요. 그런데 선생님 말씀이 뭐냐면 어쩌면 북쪽에도 당신이 통혁당 당원으로 등록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중앙정보부 쪽에는 분명 그렇게 되어 있고요. 아마 ‘민족 해방 동맹’의 최고 지도 간부였고, 통혁당 관련 인물인 김질락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남쪽의 조직이 자신들의 성과로 내세우기 위해 북쪽에 그렇게 보고했을 지도 모르겠다고 말씀하셨지요.

통혁당은 45년도의 분단, 50년의 전쟁 이후 99퍼센트 사라졌던 좌익의 잔존 세력과, 학생운동 세력, 일부 노동 운동쪽이 모여 만든 조직이고, 그 조직이 북과 연계를 가지려 한 것입니다. 북쪽의 입장은 이러했습니다. 주체 사상이 만들어지고, 분단이 지속되면서 남조선 혁명과 조국 통일을 개념적으로 분리하기 시작합니다. “통일은 남북 정부와 민중이 다 같이 해야 하는 것이고,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들이 직접 해야 한다. 그래서 남조선 인민들의 독자적인 참모부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데 북과 연결 고리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 있던 것이죠. 그런 틀에서 남조선 혁명의 참모부로 만든 것이 통혁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 특강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