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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1.14 11:55 수정 : 2008.11.14 17:10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 특강’] ⑤ 괴담의 사회사
언로 막혀있고 억압적일 때 더 활발히 떠돌아
대중 존재하는 한 괴담도 있다…속뜻 읽어야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놓고 또 다시 이념논쟁이 불붙고 있습니다. 최근 교육과학부, 국방부, 통일부 등이 “역사 교과서가 좌향좌돼 있다”며 잇따라 교과서 수정 의견을 냈고, 한나라당 등 정치권도 이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사연구회와 한국역사교육학회 등 관련 학회와 일선 교사들은 “역사는 권력의 시녀가 아니다”며 맞서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국 근·현대사를 놓고 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한겨레> 독자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사 특강’을 시작합니다. 해방 후 한국 현대사가 전공인 한 교수는 지난 10월13일부터 <한겨레문화센터>에서 매주 월요일 특강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겨레출판>에서 강의록과 녹취록을 정리해 영상과 함께 매주 금요일 오후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한홍구의 대한민국사 특강을 1회 ‘역사의 내전: 뉴라이트와 건국절 논란’을 시작으로 모두 8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 특강’ 순서

1. 역사의 내전: 뉴라이트와 ‘건국절’ 논란
2. 돌아온 간첩, 그 황당함에 대하여
3. 대한민국은 공사 중: 토목 국가와 ‘경제성장’
4. 헌법정신과 민영화 -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묻는다
5. 괴담의 사회사 - 여고괴담에서 광우병 괴담, 독도괴담까지
6. 경찰폭력의 역사 - 일본 순사에서 백골단 부활까지
7. 경쟁 만능의 비극 - 잃어버린 교육을 찾아서
8. 촛불과 민주주의


[한홍구의 역사특강⑤] 괴담의 사회사

이번 주 강의는 괴담의 사회사에 대한 내용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괴담은 존재했다. 따지고 보면 신화 자체도 괴담과 맥이 닿아 있다. 올해 들어 부쩍 ‘괴담’이 많아진 느낌이다. 촛불 국면에서 특히 5대 괴담이라고 인터넷 종량제 괴담, 독도 포기 괴담, 정도전 예언 괴담, 광우병 괴담, 수돗물 및 의료보험 민영화 괴담 등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런데 이것들을 괴담이라고 ‘칭’한 사람들은 정부나 조중동 보수언론이었다. 괴담이라는 용어 자체에 당파성이 내재되어 있다. 입장에 따라 내게 ‘진실’인 것을 상대편은 ‘괴담’이라 부르고, 내가 보기엔 분명 ‘괴담’인데, 저쪽에서는 ‘진실’이라 주장한다.

괴담 탄생의 조건

 괴담은 언로가 막혀 있고, 정보가 불분명하고, 체제 자체가 억압적인 경우 더 활발히 떠돈다. 대개의 경우 괴담을 만들고, 그것을 유통시키며 소비하는 이는 대중들이다. 대중에게도 이야기의 주체가 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 욕구를 해소할 공식 통로가 없다. 그래서 그들의 꿈과 희망, 욕망을 모아 이야기에 싣는다. 가령 조선 시대 의병장은 전투에서 두 번만 이기면 민담화되면서 겨드랑이에 날개가 생겼다. 대중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모두 진실은 아니지만, 그 속에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그들만의 육감이 담겨 있다. 옛날 서구인들이 우리 나라에 카메라를 들여 왔을 때, 사람들은 카메라가 ‘혼을 빼가는 기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 따져 보면 아주 틀린 말이 아니다. 서구인이 찍은 19세기 사진 속 조선 사람들은 대개 비정상적이고, 특이하며, 이상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시선의 주인이 아니라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진을 찍던 사람들이 조선을 빼앗았다. 혼뿐만 아니라 육신까지 말이다.

지배층이 괴담을 만들기도

 지배층에서 괴담을 유포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은 국민에게는 “국군이 38선을 돌파해 진격 중이니 생업에 종사하라”고 발표하고는 자신들만 한강 다리를 넘어 남으로 피난을 떠났다. 박정희 시대에는 석유가 나왔다, 우리도 산유국이다, 라는 이야기가 떠돌면서 <제7광구>라는 대중가요까지 유행했다. 전두환 시대인 1986년 한국 언론사의 최대 오보 사건이 나오기도 했다. 바로 김일성 사망 기사다.

 지배층이 유포한 루머 때문에 벌어진 일 중 가장 고약한 것은 이라크 전이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있다는 것을 명분 삼아 전쟁을 일으켰다. 그 루머를 누가 제일 열심히 믿었나? 바로 미국인 자신들이었다. 그 결과 엄청난 대량 살상이 벌어졌다. 그 루머를 퍼트린 부시와 네오콘은 무참한 수많은 죽음들 앞에 어떤 책임을 졌나? 그저 선거에서 졌을 뿐이다. 

없어지기 힘든 괴담, 백성의 속뜻 읽어

 부패한 곳, 부패에 대한 저항이 있는 곳에 괴담이 있다. 선망과 욕망이 있는 곳에 반드시 괴담이 떠돈다. 정치 경제의 투명성, 정보의 투명성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괴담은 언제 어디서든 만들어지고, 권력의 부패를 질타할 것이다. 대중이 존재하는 한 괴담이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괴담을 없애려 할 것이 아니라, 괴담의 이야기 속에서 그것을 만들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백성의 속뜻을 읽어야 할 것이다.

 

 다음 주 주제는 경찰 폭력의 역사다. 경찰 폭력은 이명박 시대를 상징하는 문제가 되었다. 이 정부 들어 경찰들에 의한 폭력 진압이 노골화되고, 백골단이 부활하고, 보안 경찰이 초법적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일제 시대 순사부터 친일 경찰, 이승만 시대의 경찰 통치, 경찰이 경찰에게 가하는 내부 폭력의 문제 등의 역사적 맥락을 다음 주 살펴보겠다.

 


 ■ 질문/응답 

 Q.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 활동 당시 KAL 폭파범) 김현희 씨를 직접 만나보셨나요?

 KAL기 폭파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분들이 의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담당하지는 않았지만,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KAL기 사건을 조사했습니다. 조사해보니 김현희가 KAL기를 터트린 것이 맞더라고요. 적어도 우리의 판단으로는 그렇습니다. KAL기 폭파 사건 관련해서 엄청나게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의혹의 핵심은 북의 지령에 의해 김현희가 터트린 것이냐, 아니면 안기부가 일을 벌이고서 덮어씌운 것이냐의 문제였습니다만, 그와 관련한 의혹이 약 350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민간 쪽에서 KAL 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 하던 분을 모셔다가, 그 모든 의혹을 다 적어 놓고, 하나하나 풀면서 지워나갔습니다. 몇몇 문제를 빼놓고는 거의 대부분 김현희가 범인이라는 정황이 증명되었습니다. 김현희는 분명 남쪽 출신이 아니었고요.

 물론 몇 가지 증명하지 못한 의혹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폭약 문제 같은 건데요. 김현희가 증언한 폭약과 실제 사용된 폭약이 같은지가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KAL 사건의 용의자로 김현희 외에 자살한 노인이 있었는데, 그 노인이 폭약 전문가였습니다. 김현희는 폭탄 작동법은 알고 있었지만, 폭약 전문가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민간에서는 아직도 KAL기를 안기부가 터트린 것이다, 라고 많이들 믿고 있는데요. 저희가 조사한 사항의 거의 대부분이 김현희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었는데, 그게 다 맞더라고요. 김현희도 약을 먹고 죽으려다가 살아났잖아요. 만약 김현희가 죽었다면 오히려 안기부가 꼼짝없이 뒤집어쓸 수밖에 상황이 됐을 겁니다. 저희가 결정적으로 이런 결론을 내린 이유 하나가 있는데, 몇 년간 과거사위 활동을 하면서 지켜본 안기부 조직이 그런 사건을 조작해 놓고, 20년 동안 곱게 감춰둘 만한 고급 조직이 아니더라고요. (웃음)

 

 김현희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김현희 쪽에서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사실 김현희를 만난다고 해서 조사 내용이 바뀔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김현희 만나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당신 북에서 온 거 맞소?”라고 묻고, 그에 대해 “예”라는 답변을 듣는 것뿐인데요. 뭐 따지고 보면 그 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조사 후에도 불신을 받고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내용상 북한이 김현희라는 특수 공작원을 통해 KAL기를 폭파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과거사위 활동 중 KAL기 기체 찾는 문제 관련해서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동체 추정 물체를 발견했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버마 쪽에서 초음파 사진을 보여줬거든요. 세 토막이 나 있는데, 하나는 앞이 뾰족하고, 그 다음 건 매끈해요. 세 토막난 것을 합치면 비행기 동체 길이가 나오고요. 또 옆에 떨어져 있는 물체는 랜딩 기어처럼 생겼더라고요. 그럼에도 실제로 만져봐야 동체를 발견했다고 발표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당시 버마가 우기였어요. 우기가 끝날 때까지 석달 넉달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그 사이 정보가 새나갈 수도 있잖아요. 만약 정보가 새나가서 가령 일본쪽에서 먼저 확인해서 발표하면 어떻게 합니까? 과거사위원회가 의도적으로 감추었다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초음파 사진 모양이 이러니까 99퍼센트 확실한 것이다, 라고 해서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동체추정물체로 발표를 했거든요. 그런데 바다에 들어가보니까 그게 바위였어요. 동체를 못 찾아서 유가족분들께도 죄송하고, 과거사위 입장에서도 굉장히 아쉬웠지요. KAL기 폭파 사건에 대해서는 가시적인 결과를 못 내서 아쉬운 마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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