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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6월 17일 기자회견을 열어 사퇴의사를 밝히고 있는 김용철 대법원장. 김용철 대법원장 체제가 출범한 이후 사법부에는 약간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불구속 재판의 원칙을 세워가려던 사법부의 노력은 건국대 사건으로 1986년 11월 무려 1290명이 구속되면서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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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뒤 ‘영장기각·공안사건 무죄선고’ 늘어
이근안이 고문조작한 ‘김성학 사건’ 대표적
인신구속 억제노력 ‘건대 사건’으로 도루묵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43. 암흑시대의 빛나는 판결들 (하) 김용철 대법원장의 취임 1986년 4월15일 유태흥이 역대 대법원장으로서는 처음으로 임기 만료로 퇴임했고, 다음날 법원행정처장 김용철이 새 대법원장으로 취임했다. 유태흥이 사법부의 수장으로 있던 기간은 한국 사법부의 역사에서 최악의 기간이었다. 사법부는 완전히 권력에 종속되었고, 법정소란과 재판거부가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시위 학생들에게 가벼운 판결을 내린 법관에 대한 보복인사 파문은 급기야 사법사상 처음으로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안 발의로 이어졌다. 김용철은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대법원장이 되었다. 그에 대해서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다.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일제시대에 법률교육을 받지 않고 대법원판사가 된 첫번째 인물이었다. 해박한 법률 지식과 출중한 개인적 능력으로 김용철은 유태흥보다 빨리 대법원 판사가 되어 일찍부터 사법부의 수장감으로 손꼽혀 왔지만, 10·26과 5·17의 격변기에 맹활약한 유태흥이 먼저 대법원장이 되었다. 일각에서는 김용철이 불신의 대상이 된 사법부에 새바람을 불어넣어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1975년 이후 10년간 대법원 판사를 지냈고, 5공화국 시절에는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5년제 경북중 출신 티케이(TK) 본류의 엘리트 법관인 그가 사법부에 변화를 가져올지는 미지수였다. 당시 대법원 판사는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포함하여 모두 14명이었는데, 이 중 3명을 제외한 전원이 임기만료되었다. 전두환은 5공 헌법의 대통령 단임제를 엉뚱하게 대법원에도 적용하여 임기만료된 대법원 판사 중 단 2명만 재임명하는 등 대폭적인 물갈이 인사를 단행했다. 법원 내에서 차기 대법원장 재목으로 꼽히던 이회창이나 김덕주도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이회창은 가장 많이 소수의견을 제출한 것, 김덕주는 송씨 일가 사건 재상고심에서 무죄판결을 내린 것이 탈락의 주된 이유라는 소문이 돌았다. 송씨 일가 사건 상고심에서 무죄판결을 내린 이일규는 이보다 앞서 1985년 12월15일 정년퇴임했다.
안기부, ‘주사급’ 대법원장이라 혹평 김용철이 대법원장에 취임하고 채 1년이 안 된 1987년 3월26일, 안기부는 <법원 출입기자, 김용철 대법원장 혹평 여론 유포>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최근 법원 출입기자 및 법원 일부 직원들 간에는 o. 김용철 대법원장이 부임(86.4) 이래 법관인사 이동을 비롯 법원 운영 등 주요문제 결정시 외부 눈치를 지나치게 의식, 소신껏 처리지 못하고 있으며 o.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도 외부인사나 여론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등 무능력한 업무 자세로 일관하고 있어 o.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주사급 대법원장이라고 혹평하는 여론이 유포되고 있다 함”이라고 쓰고 있다. 왜 안기부는 일국의 대법원장을 ‘주사급’이라고 혹평하였을까? 평소 일선 법관들에게 “재판은 결과 못지않게 과정이 중요”하다며 “결론이 옳아도 과정이 불만스러우면 사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강조해온 김용철은 취임사에서 “오늘의 사법부에 부여된 가장 큰 사명은 사법부의 신뢰 회복”이라고 강조했다. 김용철은 또 “사회생활의 규범인 ‘법’ 대신 ‘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될 수 없음은 너무나 명백하므로 앞으로 사법부가 법의 지배, 즉 법치주의 실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국민의 권리 신장을 위해 구속 남발을 억제하고 구속적부심사 제도와 보석제도를 활성화하는 등 불구속 원칙과 무죄 추정 원칙을 확고히 다지겠다는 뜻도 표명했다. 조심스러운 변화 김용철이 대법원장이 된 이후 사법부는 아주 조용히, 그리고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1986년 6월5일 서울민사지법 합의8부(재판장 한광세 부장판사)는 국민은 “자신의 의사에 반해 경찰관서에의 동행을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며 임의동행 요구를 거부했다가 경찰에게 폭행당한 시민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승소판결을 내렸다. 주요언론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당연히 지켜져야 할 일이 수사기관에 의해 지켜지지 않고 강제연행이 오히려 당연한 일처럼 관행화”되었던 현실을 바로잡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환영했다. 6월9일에는 수원지법 오상현 판사가 개헌을 요구하며 평화적인 교내시위를 벌이다 구속기소된 대학생들에게 “시위는 헌법이 보장한 일종의 표현의 자유의 한 방법”이라며 무죄판결을 내렸다. 같은 날 서울지법 동부지원 유원규 판사는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반정부 거리시위를 벌인 혐의로 구속기소된 대학생들을 집행유예로 풀어주었다. 시위 주동 학생들이 법원의 판결로 풀려나는 것은 유태흥 시절의 사법부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법원의 영장발부도 한층 신중해졌다. 유태흥 대법원장 시절인 3월에는 영장기각률이 3.7%에 불과했으나, 김용철 대법원장 취임 이후인 5월에는 7.7%, 6월에는 8.1%로 현저히 늘어났다. 7월14일에는 국가보안법에서도 무죄판결이 나왔다. 수원지법 성남지원 장용국 판사는 국가보안법 위반(반국가단체 찬양고무)으로 72일간 영장 없이 구금돼 조사를 받았던 김성학 피고인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장 판사는 판결문에서 “장기구금 상태에서의 자백은 증거로 볼 수 없으며 김 피고인이 했다는 찬양발언은 당시 보도기관을 통해 다 알려진 사실이므로 유죄이유가 될 수 없다”고 밝혔다. 강원도 속초 출신의 김성학은 20살 때인 1971년 아버지가 선장인 오징어배를 탔다가 북한 함정에 납치되어 1년간 억류 끝에 귀환했다. 그는 하필 군대생활을 첩보부대에서 특수훈련을 받으며 했다. 이근안이 고문한 김성학에게 무죄 1985년 12월 인천의 경기도경 대공분실로 끌려간 김성학은 여기서 ‘사장님’이라 불리던 이근안에게 6차례나 전기고문을 당했다. 수사관들은 김성학이 첩보부대에 입대한 것은 북의 지령에 의해 군사기밀을 탐지하기 위한 것으로 몰고 갔다. 볼펜이 지렁이로, 조서 용지가 요술담요로 보일 정도로 고문을 당한 김성학은 북에서 받은 간첩교육에 대해 진술하라는 추궁에 “알아야 말을 하지요”라고 답했다. ‘친절’한 수사관들은 “네가 재북 시 북에서 받아온 지령을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을 못하는 모양인데”라며 하나하나 불러주었다. 김성학은 전기고문을 당할 때 고통에 몸부림치다 눈가리개가 벗겨지는 바람에 자신의 몸에서 하얗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아야 했다. 제발 죽여 달라는 울부짖음 속에 간첩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조갑제는 사건을 담당했던 김성철 변호사의 이야기를 빌려 김성학이 “무죄를 선고받는 데는 드러나지 않게 도운 사람”이 많다고 썼다. 경찰은 김성학을 간첩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는데, 검사는 경찰이 조작해서 덮어씌운 간첩 혐의는 빼버리고 고무찬양 부분만 기소했다. 이렇게 검찰에서 한번 걸러졌기 때문에 판사도 부담을 많이 덜었다는 것이다. 또, 김성학 자신이 검찰 조사와 재판을 잘 받았다. 보통 그렇게 고문을 당한 뒤 검찰에 가면 다시 경찰이나 안기부로 보낸다는 말에 주눅이 들기 마련인데, 김성학은 끝까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한다. 김성학의 친척 중에 고시를 공부하던 사람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무죄의 증거를 수집해 제출한 것도 큰 보탬이 되었다. 이런 바탕이 있었기에 장용국 판사도 과감히 무죄를 선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권운동가 서준식은 그 당시 김성학이 무죄판결을 받은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조금씩 자신의 도리를 하면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근안이 고문해서 조작한 사건이 6월 항쟁 이전에 무죄가 나왔다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아직도 먼 사법부 독립 김용철 대법원장 체제가 출범한 이후 사법부에는 분명 약간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사법부가 인신구속에 신중해지고, 시국사건이나 공안사건에서 무죄가 선고되는 일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이나 주요시국사건 등은 여전히 정권의 입맛대로 유죄가 떨어지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불구속 재판의 원칙을 세워가려던 사법부의 노력은 건국대 사건으로 1986년 11월 무려 1290명이 구속되면서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단일 사건으로 1290명이 구속된 것은 근대 사법체계가 만들어진 이후 전세계 어느 곳에서도 없던 야만이었다. 건국대 사건으로 크게 위축되었던 사법부가 다시 중심을 잡기 시작한 것은 1987년 1월14일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고문에 대한 지탄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앞서 소개한 김헌무 판사의 재일동포 심한식 간첩 사건에 대한 무죄판결이 2월10일, 납북어부 강종배 간첩 사건에 대한 무죄판결이 3월2일 나온 데 이어, 대구고법에서도 3월11일 납북어부 여덕현에 대해 간첩죄 부분에서 무죄판결이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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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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