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9.07.08 20:32 수정 : 2010.01.07 17:22

조진국의 모어 댄 워즈

[매거진 esc] 조진국의 모어 댄 워즈





가리봉동에 있는 친구 집에서 잠깐 지낸 적이 있다. 머리를 숙이고 열 걸음은 걸어야 입구가 보이는 어두운 지하방이었다. 하지만 방문을 열면 항상 헤이즐넛 냄새가 났다. 친구가 어디선가 구해 온 커피메이커에서 흐르던 헤이즐넛의 달달한 냄새가 궁핍한 생활의 군내를 담요처럼 덮어주고 있었다. 그곳을 자주 드나들던 사람 중에 친구가 아는 동생이 있었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안 드는 여자였다. 모든 취향이 노골적이었다. 귀걸이와 핸드백, 손톱과 립스틱, 드러난 곳은 전부 번쩍거렸다. 일은 하지 않으면서 돈은 많았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불렀고, 드라마를 보면 수도꼭지처럼 울었지만 거짓말은 밥 먹듯이 했다. 그날도 그녀가 놀러 와서 티브이를 보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역시 헤이즐넛이었다. 헤이즐넛 향은 질리지도 않는다고 친구가 입을 뗀 것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좋아하는 향기’로 모였다.

그녀는 알뜨랑 비누 냄새가 제일 좋다고 했다. 자기 하나밖에 모르는 잘생기고 우직한 남자가 있었다는 자랑으로 회상은 시작됐다. 그 사람에게선 항상 알뜨랑 향이 났어. 그 사람과 결국 헤어졌는데, 이상하게 딴것보다 자꾸 그 냄새가 생각나는 거야. 그래서 슈퍼에서 알뜨랑을 사서 온몸에서 향이 날 수 있게 얼굴도 씻고, 몸도 씻었어. 또 책상 위에도 놓고, 나프탈렌 대신에 옷 속에도 넣어놨지. 미쳤지, 왜 그랬는지 몰라.

우직한 그 남자가 비누도 하나만 쓰듯, 사랑도 하나였기를 그때의 그녀는 얼마나 갈망했을까. 한줄 젖은 바람에 실린 그 향기가 그 남자와의 행복했던 한때로 다시 데려다놓기를 꿈꾸었겠지. 놓기 싫어 꼭 잡았던 그 남자의 손에서 진동하던 알뜨랑 향기가 사무치던 그 골목길로.

한줄 젖은 바람은 이젠 희미해진

옛 추억, 어느 거리로 날 데리고 가네

향기로운 우리 얘기로 흠뻑 젖은 세상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어


(1989, 박학기, 향기로운 추억)

‘향기로운 추억’은 캠퍼스에서 특히 인기가 있었다. 점심을 먹고 벤치에 앉아 있으면 스피커에선 박학기의 미성이 가늘게 떨리며 흘러나오곤 했다. 꿈결처럼 감미로워서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 노래를 들으며 스쳐가는 여자들의 귓불에 묻어 있던 향수 냄새나 물에 젖은 머리칼을 상상했던 나는, 이제 알뜨랑 비누를 떠올리게 된다.

향기는 마지막까지 남는다. 안에 담겨 있던 것들을 다 덜어내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스라이 사라져도, 보이지 않는 향기만이 남아서 추억을 마지막까지 챙긴다. 그 향기마저도 사라질 때, 진정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조진국 작가/<고마워요, 소울메이트>,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모어 댄 워즈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