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조진국의 모어 댄 워즈
나는 차는 것보다는 차이는 쪽이 편했다. 차인 적이 더 많았기에 익숙한 탓도 있겠고, 어떤 말을 꺼내든 상대를 아프게 하는 것보다 내가 괴롭고 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게 적용되지 않았다. 지금껏 버림받는 중에도 행복하라고 빌어줄 아량이 생겼던 건 그들을 정말 좋아한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너무 억울하고 힘들어서 목이라도 조르고 싶었다. 부디 행복하라고, 좋은 사람 만나라고 해줄 정신 따위는 없었다. 대신 눈물과 협박, 악담과 체념이 번갈아가며 나왔다. 나는 그녀가 나를 떠나서 불행하기를 빌었다. 바닥을 기어다닐 정도로 아파하기를, 그래서 나를 놓친 걸 후회하고 돌아와서 무릎 꿇고 빌게 해달라고 주문을 걸었다. 이러다 미쳐 내가 여리여리 착하던 그런 내가너 때문에 돌아 내가 독한 나로 변해 내가
널 닮은 인형에다 주문을 또 걸어 내가
그녀와 찢어져 달라고 고
(2009, 브라운아이드걸스, 아브라카다브라) 나처럼 속 좁은 인간에겐 절절한 순애보보다는 이런 독한 이별 가사가 더 쏙쏙 가슴에 와 박힌다. 그녀를 닮은 인형의 심장에 바늘을 찌르지 않아서 그랬는지, 그녀를 다시 돌아오게 해달라는 내 주문은 약발이 없었다. 1년이 지난 어느 봄날이었다. 새벽잠이 없는 친구와 24시간 하는 밥집에서 배를 불리고 박하사탕을 녹여 먹으며 걷고 있을 때였다. 골목쯤에서 누군가 차도에 뛰어든 짐승처럼 획 튀어나왔다.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눈에 익었다. 가로등 불빛을 얹고 가는 그의 뒷모습은 듬직했고, 어렸고, 활기찼다. 나랑은 모든 게 달랐다. 그녀의 남자친구였다. 뭔가 이상했는지 그도 슬쩍 뒤를 돌아 나를 살피더니 걸음을 빠르게 바꾸었다. 나는 박하사탕을 뱉어버렸다. 단맛은 다 날아가 버리고 쓴맛만 입안에 흥건했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그녀의 블로그를 뒤졌다. 연결된 그의 홈피에도 들어갔다. 그녀는 잘 살고 있었고, 그와도 단단한 사랑을 다져가고 있었다. 보고 있는데 다시 울컥했다. 헤어지던 그날보다 더 쓰렸다. 그놈은 나쁜 놈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함부로 군다, 결국 그녀는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는 내 시나리오는 힘없이 페이드아웃 되고 있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주문은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그녀가 돌아오게 해달라고 하는 대신, 다시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게 해달라는 주문으로 바꿔야겠다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조진국 작가/<고마워요, 소울메이트>,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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