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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1.04 18:50 수정 : 2010.01.07 16:47

조진국의 모어 댄 워즈

[매거진 esc] 조진국의 모어 댄 워즈





사철 내내 팔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 중에 하나가 팥빙수다. 눈처럼 잘게 간 얼음가루에 올린 팥을 느리게 저어가면서 야금야금 떠먹는 팥빙수의 맛을 여름에만 즐기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하다. 빨간 체리와 색색의 젤리로 장식된 모양을 보고 있으면 ‘녹는 케이크’를 앞에 둔 것처럼 기분까지 밝아진다. 팥빙수를 맛보는 순간만은 순수한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까지 받으니 항상 곁에 두고 싶은 먹을거리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나와 전혀 다르다며 웃었다. 팥빙수처럼 순진한 웃음이 아니라 다크 초콜릿처럼 씁쓸한 쪽에 가까웠다. 그녀가 그를 만난 건 몇 년 전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다. 그는 그녀가 좋아하는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했다. 바쁜 친구의 부탁으로 대신 공항에 마중 나갔다고 했다. 그는 지나치게 육중한 몸매와 부드러운 눈매 때문인지 멀리서 눈사람이 걸어오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친구가 끝나기를 카페에서 함께 기다리며, 그는 팥빙수부터 시켰다고 했다. 이게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모른다며 팥빙수 예찬을 늘어놓으며, 두 사람이 먹어도 남을 만한 양을 단숨에 해치웠다고 했다. 그 순간은 허겁지겁 얼음을 베어 먹는 북극곰처럼 보여서 웃겼다고 했다.

팥빙수 팥빙수 난 좋아 열라 좋아

팥빙수 팥빙수 여름엔 이게 왔다야

빙수야 팥빙수야 사랑해 사랑해

빙수야 팥빙수야 녹지 마 녹지 마

(2001, 윤종신, 팥빙수)


팥빙수의 순진한 기운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그를 남자로 보지 말고 그냥 즐겁게 시간을 보내자고 마음을 바꿨다고 했다. 노래방에서 그는 러시아에서 성악을 전공하는 유학생답게 풍부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팥빙수를 불렀고, 러시아 시인들의 비장한 시와 보드카를 껴안고 사는 러시아인들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었다. 그가 점점 북극곰이 아니라 얼어붙은 자신에게 봄을 선물하러 온 착한 얼굴의 전령사처럼 보였다고 했다. 늦어지는 친구가 이대로 그냥 철야라도 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변화에 무엇보다 놀랐다고 했다.

그녀와 그는 다음날부터 계속 만났다. 그리고 계속 팥빙수를 먹었다. 하나의 팥빙수에 하나의 숟가락만으로 충분한 사이가 될수록, 남아 있는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팥빙수는 더 이상 달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팥빙수가 녹지 않기를 얼마나 바랐을까. 어쩔 수 없이 녹을 수밖에 없는 팥빙수를 원망하고, 떠날 걸 알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원망하며 또 숟가락을 들었겠지.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는 추억의 집이 생긴다. 언젠가는 팥빙수처럼 녹을 수밖에 없는 집. 마침내 그녀가 그 자리에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집을 짓고 살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조진국 작가/<고마워요, 소울메이트>,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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