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0.24 19:54
수정 : 2009.09.1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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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국립전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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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문화의 달 시월엔 산야를 곱게 장식한 단풍 못지않은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전국에서 풍성하게 열린다. 문화에 대한 갈증이 일시에 폭발한 듯 행사장마다 인산인해다. 좁은 공간에 인파가 모이는 곳으로, 1971년 가을부터 해마다 두 차례 2주씩 특별전을 여는 간송미술관을 빠뜨릴 수 없다.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이 1938년 건립한 국내 최초의 사립박물관으로, 조선시대 그림에 관한 한 질적인 면에서 국립박물관을 능가함을 자타가 공인하는 ‘민족문화의 보고’이다. 올가을 제75회 기획전인 ‘보화각 설립 70주년 기념 서화대전’ 또한 어김없이 감상이 힘들 정도로 관람객이 운집했다. 신윤복을 주제로 한 소설과 현재 방영되는 드라마 바람이 가세해 <미인도>를 찾는 인파로 성북동이 들썩인다.
우리 그림의 특징과 어엿함을 드러낸 <청풍계>, 소생의 봄날 자연과 교감하는 따듯한 선비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선명히 보여주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종실서화의 격조를 가늠케 하는 탄은 이정의 <삼청첩>, 힘차고 당당한 추사 김정희의 <예서대련> 등 일당백의 명품과 걸작들로 문화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대변한다.
풍속화의 쌍벽인 단원과 달리 신윤복은 생몰 연대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림에 남긴 간기로 1805년부터 1813년까지 8년간의 활동이 확인될 뿐이다. 그에 관한 문헌기록이 몹시 드물어 그림만으로 그의 면모를 유추하게 된다. 풍속화 내 농염한 분위기는 그가 빈번하게 교방을 출입했음을 암시한다. 일제강점기 춘화의 수요로 혜원을 빙자한 방작이 적잖이 제작되었다. 화격으로 구별이 가능하나, 진작은 백 점에 이르지 못한다. 부친 신한평은 임금 초상 제작에 참여한 명성 높은 어용화사로 노년까지 도화서에 근무했다. 근 40년 봉직은 상피(相避, 부자가 같은 직장 근무를 피함)로 아들을 제도권 밖에 머물게 한 이유이다. 전화위복이랄까, 이런 상황에서 더욱더 자유스런 창작활동이 가능해 조선 최고의 그림 <미인도>를 비롯한 국보 제135호 <혜원전신첩> 같은 백미를 탄생하게 한다.
단원이 그러하듯 그는 풍속화만 그린 것은 아니다. 남종문인화풍의 산수, 사실적인 묘사와 서정성의 절묘한 조화를 보인 동물 그림, 글씨에도 능했다. 이들 풍속화는 조선이 숨막히도록 옥죄인 사회가 아니었음과 선조들이 낙천성과 익살이 어우러진 맑고 밝으며 어진 민족성을 지녔음을 알려준다. 조선 후기 진경시대의 활기찬 사회 분위기와 실상, 삶의 이모저모의 숨결과 체취가 감지될 정도로, 그 어느 기록보다 사실적이며 진솔하게 전해준다. 당시로서는 첨단인 도심의 세련미를 전해주는바 우리 심저, 그리고 유전인자 속에 깃든 민족의 가락 잡힌 정서를 오늘날 우리에게 새롭게 알려준다.
우리 민족은 문화 수용에는 능동과 적극성을 발휘했고 이를 취사선택해 독자적인 고유 문화를 창출했다. 동양사상의 정수이며 핵인 불교나 유학을 탄생지보다 훨씬 진일보 발전시킨 공로를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오늘날 나라 밖에서 사랑을 받는 한류는 결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원복 국립전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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