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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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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16세기 영국의 위대한 작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21세기의 영국 어린이들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런데 19세기 조선의 위대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저서는 21세기의 한국 지식인 대부분이 읽지 못한다. 영어로 된 <로미오와 줄리엣>은 영어를 배운 사람이면 누구나 큰 어려움 없이 읽지만, 한문으로 된 조선시대의 고전들은 전문가가 아니면 누구도 읽지 못하고 번역을 통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극소수의 한문 해독자를 제외한 우리 국민 대부분은 한문 고전 앞에서 까막눈이다. 전근대 시기의 한문 고전들을 잘 읽을 수 없으니 자연 우리 역사·전통문화와는 단절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외국의 문화나 역사에는 밝으면서 우리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비극적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조상의 역사나 삶을 기록한 일대기가 있어도 한문으로 되어 있기에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까막눈, 링컨이나 처칠은 잘 알면서, 정조나 세종대왕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실상인 것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자 1965년 박종화·이병도 선생 등에 의해서 ‘민족문화추진회’(이하 추진회)가 설립되었고,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한문 고전을 정리·간행하고,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1975년에는 ‘국역연수원’을 설치하여 국역자를 양성하는 사업도 함께 진행해 왔다. 추진회의 지난 42년간의 역사는 한마디로 ‘비참하면서도 찬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전국의 한학자들이 모여들어 생계를 꾸리기도 어려울 정도의 보수를 받아가면서 한문 자료를 정리하고, 번역을 해냈다. 그 결과 최치원의 <고운집>을 비롯하여 <퇴계집> <율곡집> 등의 문집을 표점영인으로 간행하고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번역서를 출간하였다. 이러한 업적이 인정을 받아 지난해에는 ‘한국고전번역원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11월23일에는 마침내 ‘한국고전번역원’이 역사적인 개원을 맞이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한국고전번역원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새로 정부출연기관이 되면서 기존의 간행·번역 업무를 더 체계적으로 수행하고, ‘고전번역위원회’를 통하여 번역·간행 서목을 결정하며, ‘평가위원회’를 구성해 번역서의 질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고전번역연구소’는 번역 사업에 대한 이론적인 뒷받침을 제공하고, ‘고전자료센터’는 일반인들에게 한문 자료를 쉽게 풀어주는 자문 서비스를 수행하고 있다. 교육원으로 체제를 바꾼 연수원은 체계적·과학적인 교육을 통해 번역자를 양성하고 있다. 특히 번역자 양성은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번역자 양성에는 원로 한학자들의 할일이 절대적인데, 그분들이 계속 세상을 떠나시니 원로 학자들이 남아 계시는 동안 좀더 집중적으로 투자해야만 한학의 계승이 가능하고 수준 높은 번역 사업도 담보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라의 형편이 어려운 것이야 잘 알지만 그래도 일에는 선후가 있는 법이니, 차제에 국가는 번역자 양성을 위한 사업에 아낌없는 배려를 해 주기 바란다. 전국의 도서관에 흩어져 있는 한문 고전들이 언제쯤이나 모두 번역되어 온 국민이 고전 문화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게 될지, 번역원을 책임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답답할 뿐이다.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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