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1.16 18:49
수정 : 2009.09.16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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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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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과속 스캔들>이 관객 600만 명을 넘어섰다. 흥행의 이유를 두고 ‘가족영화’, ‘공식을 제대로 살린 영화’, ‘자극적이지 않은 내용’ 등등의 말들이 나온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내가 눈여겨본 건, 이 영화가 반영하고 있는 우리 여론 문화의 한 모습이다.
우선 이 영화는 소재 면에서 ‘가족영화’가 맞지만,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을 다룬 영화’냐고 묻는다면 의문이 생긴다. 영화 속 가족이 함께 살기 어렵도록 만드는 원인을 짚어보자. 30대 총각 연예인에게 졸지에 딸과 손자가 생긴다. 중학교 때 함께 ‘사고’친 여학생이 미혼모로 딸을 키웠고, 그 딸이 또 미혼모로 아들을 키우다가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를 찾아온 것이다. 남자의 집은 크고, 딸과 손자도 예쁘고 똑똑하다. 뭐가 문제일까. 생활 습관의 충돌 같은 게 나오지만 부차적이다. 정작 문제는 아직도 아이돌 스타의 이미지로 팬들에게 어필하던 남자의 위신이다. 그에게 숨겨놓은 딸과 손자까지 있다는 게 알려지면, 사회의 손가락질을 받음은 물론 밥줄까지 위태로워질 것 같다.
남자가 딸의 존재를 숨기자 딸은 집을 나가고, 영화에서 둘 사이에 타협의 길은 제시되지 않는다. 위신(그리고 밥줄)이냐, 가족이냐. 이 갈등은 남자의 갈등, 혹은 남자와 남자의 과거를 용인하지 않으려는 사회의 갈등이지,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이 아니다. 이걸 어떻게 풀 건가. 내가 재밌게 본 건 이 부분이다. 영화의 결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거칠게 말하면 이런 거다.(조금은 드러내겠지만 영화엔 더 디테일한 재미가 있다.) 남자는 열심히 머리 싸매고 고민했는데, 막상 닥쳐보니 고민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남들의 시선을 항상 의식하며 살지만, 막상 남들은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다. 종종 여론이 개인적인 일을 가지고 한 사람을 두들겨 패는 일이 생기지만, 우리 사회에선 그 사유가 비난받아 마땅한 건지, 그런 비난이 정당한 건지 시시비비를 끝까지 가리지 않는다. 그저 잠잠해졌다가 이슈가 생겼다 싶으면 되풀이할 뿐이다. 이슈가 덜 된다면 거기 걸려들 확률은 낮아진다. 막상 사건이 터진 뒤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걸 보며 당혹해하는 남자의 모습, 그게 신선한 코미디로 다가왔다.
두 번째로, 이런 전개가 공식적인 건가. 장르 영화의 본고장인 할리우드에서 만들었다면, 이 남자에게 비난이 쏟아지고 거기에 맞서 남자가 스스로를 변호하거나 제3자가 그를 위해 논쟁을 펼치지 않았을까. 미혼모 문제든, 연예인 사생활 문제든 의제를 좀더 다듬을 것이고. 누군가 할리우드 장르 영화는 미국이 훌륭하거나 훌륭해질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긍정하게 하는 데에 종사한다고 했다. 그 영화들은 그러기 위해 쟁점을 드러낸다. 이 영화는 쟁점을 기막히게 피해 간다. 이 사회가 훌륭한지, 훌륭해질 수 있는지 묻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2대에 걸친 미혼모라는 설정부터 자극적이다. 한국 사회가 미혼모에게 관대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설정으로 600만 명이 봤는데도, 이 영화로 야기되는 사회적 논쟁이 없다. 역으로 자극적이지 않아서 좋다고 한다. 이 영화는, 논쟁적인 것 같지만 실은 논쟁을 피하고 묻어두려 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영화 안팎으로 여실히 보여주지 않는가.
임범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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