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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2.20 18:26 수정 : 2009.09.14 18:55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문화칼럼

어른들이 “요즘 애들이 저런 드라마를 좋아하다니…” 하며 혀를 차게 하는 월화드라마 <꽃보다 남자>(꽃남)에 이어, <미워도 다시 한번>이 수목드라마의 최강자로 떠오르면서, 이제 ‘막장 드라마’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지난해 하반기 <너는 내 운명>과 <에덴의 동쪽>으로 시작해,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으로 이어진 뒤니, 이제 모든 주요 시간대가 막장 드라마로 도배된 셈이다. 모든 대세에는 필연적 이유가 있다. 섣부른 윤리적 평가에 앞서, 그것의 의미를 차분히 설명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이전에는 다소 완성도가 떨어지는 드라마에서만 불륜, 복수, 출생의 비밀, 과도한 신데렐라 발상 등의 자극적인 요소가 과도하게 집중되었다면, 지금의 막장 드라마는 이런 상투적이고 자극적인 요소가 빠른 속도와 산뜻한 구성, 선명한 인물 형상화를 갖춘 이른바 ‘명품 막장’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지금 새 경향은 가족애나 휴머니즘 따위를 표면적으로 내세운 뒤 이야기를 질질 끌면서 자극적인 장면으로 다음 회 시청을 낚아채는 드라마가 아니다. 권력욕, 금전욕, 애욕, 소유욕 등 우리의 벌거벗은 욕망을 활어회처럼 날것 그대로 보여주고자 작정을 하고 제대로 몰아붙이는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이를 대세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우리다. 10년 전 경제위기 때 유행했던, 여주인공 둘이 야망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짓밟고 싸우는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토마토> 등)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그악스럽고 여유 없는 지금의 드라마들은, 자신의 욕망을 반추하고 타인을 배려할 만한 조금의 여유조차 없는 우리의 심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결국 공멸의 길임이 분명하건만, 인물들은 욕망의 전쟁터에서 서로 짓밟고 당하고 복수한다. 최소한의 법이나 윤리 같은 것이 완전히 무력화된 상황에서 인간들이 무언가를 지향하는 바도 없이 그저 견딜 수 없어 몸부림치고 서로 짓밟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막장 드라마와 지금 우리의 현실은 매우 닮아 있다.

나는 그런 점에서 이들 막장 드라마의 핵심은 ‘견딜 수 없는 굴욕’이라고 보인다. 그 점에서는, 그저 순정만화적 판타지만을 화려하게 나열하는 듯 보이는 <꽃남>도 예외가 아니다. 요즘 드라마에서 무릎 꿇는 장면, 노골적으로 모욕을 주는(<꽃남>의 밀가루 세례 등) 장면이 부쩍 잦아졌는데, 바로 이것이야말로 막장 드라마가 궁극적으로 애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굴욕을 해결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꽃남>이 독특한 것은, 다른 막장 드라마가 이 굴욕을 ‘복수’로 보상받으려 하는 데 비해, <꽃남>은 왕자님의 ‘사랑’과 그에 수반되는 ‘돈과 권력’으로 보상받으려 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꽃남>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고 느끼는가? 그러나 요술램프처럼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재벌 후계자나, 다른 막장 드라마의 복수 설정이나 사실 오십보백보다. 돈과 권력이 없으면 수시로 짓밟히고 모욕당하는 현실인식에서는 냉철하게 극단적이지만, 그것의 보상 방식은 순정만화적이라는 점이 <꽃남>의 차이라면 차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꽃남>을 보면 요즘 애들이 걱정된다고들 하지만, 나는 애, 어른 모두 걱정스럽다.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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