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3.06 18:00
수정 : 2009.09.14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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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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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내가 처음 기형도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을 통해서였다. 그가 죽은 지 1년 뒤인 1990년에 출간된 산문집이었다. 우연히 구하게 된 그 책의 저자가 벌써 일 년 전에 죽었고 하필 그 산문집 제목이 ‘짧은 여행의 기록’이었다. 이 상징적인 책의 제목은 내겐 무척 매혹적이었다. 게다가 그 책의 저자가 요절시인이라니. 문학소년이었던 열아홉살인 나도 어쩌면 그때 요절을 꿈꾸었을지 모른다. 어리고 감상적인 마음에 어쩐지 시인은 요절해야 하는 존재로만 여겨졌을지 모른다. 책의 표지에는 그의 흑백 사진이 인쇄돼 있었는데, 어쩐지 처연하게 웃는 양이 쓸쓸해 보여서 굳이 약력을 펼쳐보지 않더라도 그 사진은 영정사진처럼 보였다. 영정사진은 어쩐지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고삼이었다. 지금만큼은 아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도 고삼은 힘겨운 시절이었다. 게다가 우리에겐 전교조의 상처가 가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채였다. 이따금 소읍의 구석진 곳에 있는 전교조 사무실에서 해직된 선생님들을 만나곤 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고삼은 내게 그런 상처를 애써 외면하기를 강요했다. 자율학습까지 모두 끝내고 퀴퀴한 냄새로 가득찬 독서실에 돌아와 내가 하는 일이라곤 기형도의 산문집을 펼쳐드는 일뿐이었다. “희망은 있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이 도저한 삶과 삶들, 이해할 수 없는 저 사람들은 오래전에 나에겐 부재했을 것이다. 나에게 희망은 어떤 모습일까.” 그런 구절을 읽으며 알 수 없는 일기에 골몰하기를 매일 밤 반복했던 나날이었다.
기형도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읽은 건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였다.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 나는 어쩔 수 없이 우울한 군상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시를 쓰는 동기들은 모두 기형도를 앓고 있었다. 더러는 학교에서 가까운 기형도의 묘소에 다녀오기도 했고, 더러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빈집>) 같은 구절들을 술자리에서 읊조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또 누군가는 기형도의 시풍을 흉내 내어 그에 관한 시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봄 우리는 거의 매일 거리에 있었다. 나와 같은 학번이기도 했던 강경대가 공권력의 폭력으로 죽은 뒤 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이어졌다. 집에 돌아와 머리를 감으려고 고개를 숙이면 머리카락에서 우수수 최루탄 가루가 떨어지곤 했다. 우리는 시대의 절망을 뛰어넘으려고 했으나 그해 봄이 지나자 우리에겐 우리가 어찌해 볼 수 없는 더 큰 절망이 찾아왔다. 이제 갓스물을 넘긴 문학도들의 감수성만으로 가득 채우기에도 모자랐던 가슴은 심하게 훼손된 채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그때 기형도는 그 너덜너덜해진 가슴에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의 시는 현실을 도피한 자가 만나는 언어가 아니라 우리가 끝끝내 놓치고 싶지 않았던 감성의 보루였다.
생각해보면 그의 시는 삶의 절망적인 순간마다 어떤 위로의 얼굴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가 죽은 뒤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의 시에 뿌리내린 도저한 죽음은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은 아니었을까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김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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