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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4.24 22:29 수정 : 2009.09.14 18:51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문화칼럼

요즘 드라마를 보면 무릎 꿇기 대회를 하는 것 같다. <꽃보다 남자>와 <미워도 다시 한번 2009>에서는 목줄을 죄는 대기업 회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내조의 여왕>에서는 남편의 취직을 위해 옛 애인과 친구 부부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런 굴욕은 강렬하게 시청자를 자극한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너보다 내가 힘이 있으니 까불지 말라는 과시에 굴욕을 느끼는 장면은 요즘 드라마에서는 단골 메뉴이다.

굴욕은 설욕을 부른다. 요즘 드라마의 가장 큰 공통점은 바로 이 ‘굴욕과 설욕의 서사’가 남달리 강해졌다는 것이다. 굴욕과 설욕의 서사는 세상을 철저하게 서열의 질서로 보는 시각의 소산이다. 강자는 약자를 짓누르며 살고, 약자는 강자 앞에 굴욕을 느끼면서도 스스로 굴복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요즘 드라마에서 굴욕과 설욕의 서사가 강해졌다는 것은, 이런 서열의 질서로 세상을 파악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세상이 철저하게 서열화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사소한 일상에서 모두 굴욕을 느끼게 된다. 직장의 상사에게 부당하게 닦달을 당하고 목줄 잡혀 살며, 보잘것없는 ‘을’이 슈퍼 ‘갑’에게 굽실거리는 것만 굴욕이 아니다. 작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큰 평수 거주자에게,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등수가 높은 아이에게, 남편 월급이 적은 아내는 연봉 높은 남편 가진 아내에게, 심지어 월급 사장은 오너 회장에게 굴욕을 느낀다.

이는 어느 정도 우리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는 특정한 시각이기도 하다. 아파트 평수나 학교 성적 등수나 가계 수입 따위로 서열 의식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이런 굴욕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반면에 서열 의식이 강하면, 최신 명품 구입 현황이나 심지어 여자친구의 면면까지 서열화하면서 굴욕을 느낀다. 나는 어느 인터뷰에서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내 애인보다 나은 여자를 애인으로 데리고 나올 때 기분이 좋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대학생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못하다’와 ‘낫다’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놀랍기만 하다.

현실이나 사고방식에서나 이쯤 되면 중증이다. 현실 속 서열화는 생존의 위기로까지 다가오며, 사람들은 사소한 것까지 모두 서열화하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평등과 다양성의 가치는, 현실과 사고 모두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 사람은 굴욕만이 아니라 설욕과 복수까지 꿈꾼다는 것이다. 1960년대까지 대중예술에서도 스스로 굴복하는 굴욕은 흔했다. 하지만 그때에는 그 굴욕을 그저 자신이 못난 탓으로 돌려 자학하고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것이 신파적 서사의 본질이다. 이 신파성이 지긋지긋해진 1970년대 청년문화 세대는 이를 애써 거부했고 이런 굴욕과 자학은 한동안 유치하다고 치부되는 듯했다. 그러나 2000년대 그것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것도 이전과 달리 ‘복수’의 칼날을 가슴에 숨긴 채 강자 앞에서 무릎을 꿇는 방식으로 더욱 극악해졌다.

혹시 그것이 약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가? 글쎄, 복수는 서열화와 굴욕의 확대재생산이자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 아닐까.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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