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5.01 22:22
수정 : 2009.09.14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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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 국제연극평론가 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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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올해 들어 셰익스피어 공연이 부쩍 늘었다. 아시아 연극연출가 워크숍의 일환으로 한국, 중국, 인도의 연출가들이 <사랑의 헛수고>, <리어>, <햄릿>을 연달아 공연한 데 이어 5월엔 극단 미추가 손진책 연출로 <태풍>을, 고양 아람누리 극장에선 심재찬 연출의 <오셀로>를 올릴 예정이고, 의정부국제음악극제에선 폴란드의 야외극 <맥베스-저 피투성이의 남자는 누구인가?>가 초청 공연될 예정이다. 10월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선 이탈리아 극단의 <햄릿>이 초청되어 있다. 11월엔 연희단 거리패가 이윤택 연출로 <햄릿>을 올린다. 가히 셰익스피어 열풍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이 올해만의 특수현상은 아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지속적인 현상이다. 또 한국만 그런 게 아니라 세계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다. 영미권은 말할 것도 없고 폴란드, 헝가리, 아르메니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권에서는 셰익스피어 연극만을 공연하는 국제 셰익스피어 연극제가 매년 또는 격년제로 열린다. 셰익스피어가 공연되고 기념되고 축하되는 방식도 해마다 다양해지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셰익스피어 연극제는 1인극 축제다. 특히 내년 루마니아의 크라이오바에서 개최되는 국제 셰익스피어 연극제에서는 <햄릿>만 공연된다. 아시아에서도 한국과 일본이 초청되었다.
이 열풍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선 분명한 것은, 셰익스피어가 죽은 지 근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를 능가하는 극작가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다루는 희극에서나 인간의 운명을 다루는 비극 모두에서 그가 보이는 사람의 심리에 대한 신적인 이해, 이야기를 연극적으로 꾸미는 구성력과 언어적 표현력은 아직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삶을 꿰뚫는 그의 통찰이 여전히 유효하다. 많은 고금의 극작가들이 삶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공감을 얻지도, 진실에 접근하지도 못했거나, 삶을 지나치게 추상화하여 대중과 소통하는 데 실패해왔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4세기 전에 이미 삶의 신비를 인간존재의 다의성으로 번역해냄으로써 삶과 연극의 상호반영성을 극대화했다. <오셀로>에서 악의 화신 이아고는 정의가 승리한 다음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으며, <리어>에서 참회한 리어는 선한 딸 코딜리아와 함께 죽고, <맥베스>에서 악인 맥베스가 겪는 극도의 고통이 동정적으로 그려져 있고, <햄릿>에서 부정한 권력과 욕정에 사로잡힌 세력과 정의를 좇는 무죄한 세력 모두가 파멸하도록 처리함으로써 셰익스피어는 선의 일방적인 승리를 부정하고 악의 항존성을 서술하였다. 그런 그의 인간관과 세계관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간악의 극치까지도 예견케 하는 통찰력을 갖고 있다. 몇 년 전에 타계한 폴란드의 천재적 연극평론가 얀 코트는 셰익스피어를 “우리의 동시대인”이라 불렀다. 공간과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 진실을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전세계가 셰익스피어를 자국의 사회와 인간을 비추는 거울로 사용하고 있다. 인간의 어둡고 어리석고 불확실한 존재성을 셰익스피어만큼 진실하게 비추는 거울이 아직 없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한 동시대인이다. 이것이 셰익스피어 열풍의 현상학이다.
김윤철 국제연극평론가 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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