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5.29 20:50
수정 : 2009.09.14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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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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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28일에서 29일로 넘어가는 자정, 누군가의 제안으로 ‘상록수’가 전국에 울려 퍼졌다. 29일 영결식이 열린 경복궁에서도, 노제가 열린 시청 앞 광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노래는 김민기의 1977년 노래다. 음악 활동을 금지당한 김민기가 제대 뒤 부평 근처의 공장에서 일할 당시, 동료들의 합동결혼식에서 축가로 불리며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이듬해 양희은의 앨범에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이란 이름으로 실렸고 1993년 김민기가 오랜 침묵을 깨고 내놓은 앨범에 ‘상록수’로 다시 빛을 봤다. 부평의 작은 공장에서 시작된 이 노래는 1998년 외환위기를 극복하자는 메시지를 담은 공익광고에 쓰이면서 캠페인송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이제, 떠나간 한 남자를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 그를 향한 전국민적 애도의 노래가 됐다.
2002년, 대선 광고에서 서툰 솜씨로 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담담히 부르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때도 이미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대선 후보로 나온 정치인이 민중가요와 대중가요의 경계에 있는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목소리에는 정치인의 엄숙주의도, 프로 뮤지션의 표현력도 없었다. 음정도 살짝살짝 엇나갔다. 그러나 소박한 진심이 있었다. 그 목소리는 한 음 한 음, 어설피 코드를 짚고 줄을 뜯는 손과 함께 이 땅의 대선 광고에서 볼 수 없었던, 또한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순간을 만들어냈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됐다. 모든 현실이 이미지와 일치하는 건 아니었다. 현실은 종종 기대를 배반했다. 대통령으로 있던 5년 동안 그는 다시 ‘상록수’를 들려주지 않았다. 어디선가 불렀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들리지는 않았다. 정치는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정치가 없어도 어쨌든 잘살 수 있었다. 올라가는 주가와 불어나는 펀드가 정치보다 훨씬 짜릿했다. 누군가는 폭등하는 아파트 가격에 큰 웃음을 짓기도 했을 것이다. 2002년 연말을 들뜨게 했던 정치의 짜릿함을, 욕심의 파도가 순식간에 휩쓸고 갔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욕망은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2008년의 대선 가도에는 ‘상록수’ 같은 노래 대신, 이명박 찬양 메시지로 개사된 온갖 유행가들만 나부꼈다.
대통령 하나 바뀌었을 뿐이다. 존재했으되 활용하지 않았던 사회적 공론장은 촛불이 지나간 후 탄압의 대상이 됐다. ‘국민 스포츠’였던 대통령 씹기가 눈치와 울화의 대상이 됐다. 신자유주의적 욕망이 만들어낸 이 정부는 기득권의 탐욕만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상록수가 시든 자리에 돈이 열리는 나무가 심어졌다. 우리에겐 출입이 금지된 울타리가 둘러진 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나던 날, 경복궁 들머리에서 노란 손수건마저 압수당하던 날, 시청 앞에서 다시 ‘상록수’를 불렀다. 중간중간 자꾸 울컥했다. 그가 더는 여기에 없어서. 그가 다스리던 세상은, 그래도 꽤나 살만했던 세상이었구나 싶어서. 그런 세상을 다시 만나기 위해 얼마나 더 몹쓸 꼴을 봐야 하나 울분이 터져서. 어설픈 기타 연주가 그립다. 담담한 노랫소리가 그립다. 민주주의가 무심히 곁에 있던 세상이, 눈물 나게 그립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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