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6.19 19:52
수정 : 2009.09.16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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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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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재밌게 본 영화들 가운데, ‘내가 왜 그 영화를 그렇게 좋아했지?’ 하고 궁금해지는 게 있다. 몇 달 전 그런 영화들을 다시 봤다. 가장 먼저 본 게 <퀴즈 쇼>(1994년, 로버트 레드퍼드 감독)였다. 다시 보니 좀더 명쾌해졌다. 타인의 명예감정을 존중하는 것, 그게 얼마나 소중하고 따듯한 것인지를 말하는 영화였다. 다시 보길 잘했다. 지금 이 영화를 말하는 건 노무현 전 대통령 때문이다.
<퀴즈 쇼>는 1950년대의 실화를 다룬다. 공영 방송사 <엔비시>(NBC)가 퀴즈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높이려고, 특정인에게 미리 문제를 알려주며 승자를 조작해 오다가 의회 청문회에 적발된다. 이 비리를 적발한 건 입법조사관 딕 구드윈이다. 하버드 법대를 나온 변호사로, 월가 거대 로펌을 마다고 의회로 왔다. 돈보다 세상에 기여하는 일을 하려는, 의로운 마음을 가진 이다. 딕은 퀴즈 왕들로부터 잇따라 ‘문제를 미리 받았다’는 진술을 듣는데, 한 명이 부인한다. 저명한 문필가, 학자를 배출한 명문 밴도런가의 찰스 밴도런으로, 그 역시 컬럼비아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친다. 딕은 찰스가 거짓말한다고 확신하면서도 그를 몰아붙이지 않고 주저한다. 찰스의 집에 가서 그의 아버지를 본다. 자연에 묻혀 살면서도 사회를 보는 눈이 깊고 정확하다. 이런 가문의 명예를 망가뜨리기가 아까웠던 걸까, 아니면 이런 사람들일수록 명예감정이 다치면 정말 깊게 상처 입는다는 걸 알았던 걸까.
처음엔 그런 딕이 답답해 보이다가 이내 뭉클해졌다. 남의 비리를 파헤치는 일을 하면서도 저렇게 신중하고, 상대방의 명예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딕의 부인이 말한다. “자기는 밴도런보다 열 배 남자답고 열 배 똑똑하고 열 배 인간적이야. 그런데도 그를 보호하기 위해 굽실거리고 있어.” 딕이 답한다. “내 목표는 돈을 위해 대중 조작을 일삼는 방송사 간부와 광고주를 고발하는 것이지 거기 동원된 사람들을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고.” 청문회가 시작된 뒤, 뜻밖에 찰스가 자발적으로 증언대에 선다. 그의 부모가 동석한다. 찰스는 문제를 미리 받아 왔음을 고백한다. 그때 놀란 눈으로 찰스와 그의 아버지를 보던 딕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스스로 원칙을 지키면서도 세상과 타인에 대해 경외심을 잃지 않고 있는 사람의 표정. 그 일 이후 찰스는 교단에 서지 못했다. 청문회도 방송사 간부와 광고주를 처벌하지 못하고 끝났다. 그럼에도 영화가 따듯했던 건 이런 딕 때문이었다.
노무현을 떠올린 건 두 가지 점에서다. 우선은, 그를 수사하고 그걸 보도했던 이들에게 딕 같은 신중함이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부질없다. 비리로 구속됐다 다시 정치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고, 비리 수사가 정치 게임처럼 돼버린 지 오래인 이 사회에서 누군들 명예감정이 그렇게 소중하다는, 사람을 죽게까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둘째는, 영화에서 노무현의 모습이 겹쳐지는 게 찰스가 아니라 바로 딕이기 때문이다. 그는 청문회에서 사람을 추궁할 때도 문제가 된 사안을 벗어나지 않았다. 인신공격하거나 망신주지 않았다. 대통령이 돼서도 칼을 휘두르는 대신 원칙을 따지며 토론했다.
그가 죽은 뒤 그를 투사로, 승부사로 재조명하는 말들이 나오는데, 썩 미덥지가 않다. 그보다 내가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영화의 대사를 빌려 한마디 하고 싶다. 당신은, 당신을 힘들고 버겁게 만들었던 그 누구보다도 열 배 남자답고 열 배 똑똑하고 열 배 인간적이라고.
임범 대중문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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