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7.17 19:22
수정 : 2009.09.16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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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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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카페에 40대 중반의 남자 둘이 앉았다. (남자 김)“오늘은 조금만 마시자 그랬지? 그럼 제일 비싼 ….” 김은 수입 맥주인 ㄱ맥주를 두 병 시켰다. (남자 박)“싼 거 시키지. 요새 불황에 소주랑 국산 맥주가 잘 팔린다잖아. 위스키와 와인은 떨어지고. 한국 술 대단해. 엊그제 뉴스엔 진로 소주가 작년 전세계 증류주 가운데 제일 많이 팔렸다고 나오고.”
김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김)“희석식 소주가 어떻게 증류주냐. 원료가 뭔지 관계없이 아무 주정이나 가져와서 물 타고 감미료 넣어 만든 거잖아. 주정이 증류해서 만든 거라고 그렇게 분류한 모양인데, 엄밀한 의미에서 증류주, 영어로 스피릿이 아니라고. 국산 맥주도 말야, 맥주용 보리를 수입하는데 그게 비싸니까 100% 보리로 만든 게 ‘하이트 맥스’ 하나뿐인 거 알아?” (박)“값이 싸잖아. 그리고 출출할 때 맛있는 안주랑 함께 떠오르는 술로 소주만 한 게 있어? 물론 우리가 거기에 길들여진 거겠지. 라면, 자장면처럼. 절대적인 미각 말고도 관습이나 향수에 좌우되는 문화적인 미각이 있다고. 그런 걸 ‘소울 푸드’라고 하지. 국산 맥주도 그래. 향이 약해 폭탄주 먹을 땐 더 좋다고.”
박은 ㄱ맥주를 한 병 비우자 국산 맥주를 주문했다. 종업원이 ‘하이트냐, 카스냐’를 묻자 “아무거나 찬 거”를 달라고 했다. (김)“그것 봐. 아무거나.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 ‘비어 인 코리아’를 치면 이렇게 나와. 한국의 대다수 식당에선 한 가지 맥주만 갖다 놓는다는 거야. 별 차이가 없으니까 아무거나 마신다는 거지. 소주도 그래. 대한주정판매에서 주는 주정을 받아다 쓰니까 ‘처음처럼’이든 ‘참이슬’이든 어떤 물과 첨가물을 넣느냐의 차이밖에 없다고. 다양성이 없는 거지. 다양성이 없으면 문화가 없는 거야. 뭘 먹든 배부르면 된다는 식이면 음식 문화가 발달하겠어? 특히 술 같은 기호식품은 다양성이 생명이라고.” (박)“한국에서 술은 생활필수품 아냐? 회식, 접대, 혹은 생활고의 스트레스 땜에 어쩔 수 없이 마시는 일도 많잖아. 그리고 그렇게 다양성이 중요하면 사케나 수입 맥주 마시면 되잖아.”
김이 ㄱ맥주를 잔에 마저 따르더니 거품을 유심히 본다. (김)“원래 좋은 술은 이사 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고. 현지의 술을 마시라는 거지. 이거 봐. ㄱ맥주는 거품이 생명인데 거품이 없잖아. 미국에서 그랬대. 금주령 뒤 살아남은 맥주가 다 대량생산되는, 밍밍한 라거 비어(저온 발효 맥주)였다는 거야. 그러다가 80년대에 전통적인 제조 방식으로 맛과 향을 살린 새뮤얼 애덤스라는 맥주가 나오자 애주가들이 그 맥주 마시기 운동을 벌여 단박에 최고의 맥주로 꼽히게 했대. 우리도 ‘한국의 애주가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쳐 봐?” (박)“야, 정신 차려. 주세 올린다잖아. ‘죄악세’라는데 미안한 줄 알고, 더불어 아직도 싼 걸 고맙게 여기면서 마셔야지.” (김)“‘죄악세’라는 생각은 술을 문화로 인정하기는커녕, 생필품으로도 인정하지 않는 거라고. 안 먹어도 되는 걸 돈 낭비, 건강 낭비, 시간 낭비하며 마신다, 이런 거잖아. 그게 서민 생활고를 가중시킨다는 비난을 받고서야 시들해지는 걸 보면, 역시 한국에서 술은 생필품인 거지.” (박)“내 말이 그거잖아. 그러니 생필품에 무슨 맛이고 멋이고 투정부리지 말고 마시자고!”
그때부터 둘은 국산 맥주를 더 시키고 소주까지 시켰다. 종업원이 어떤 소주냐고 묻자 또다시 ‘아무거나’라고 말했다. ‘조금만 마시자’고 했던 것과 달리,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소주 폭탄주를 마시고 2차까지 가면서 만취해버리고 말았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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