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7.24 19:49
수정 : 2009.09.14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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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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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몸을 잊고 있었다. 원고지와 씨름하고 시국을 한탄하다 보니 느는 것은 한숨과 술잔뿐. 어찌 비관주의가 일용할 양식이 될 수 있으랴. 몸을 바꾸지 않고는 나약하고 창백한 먹물의 우울만이 깊어가리.
싸구려 자전거를 두 대 샀다. 아내 것은 장보기용 바구니를 달았고, 내 것에는 뒷자리에 짐을 실을 구조물을 설치했다.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고 홍제천을 따라 한강까지 달렸다. 한강은 혼탁했고 악취는 때로 괴로웠지만, 바람을 가르는 일은 즐거웠다. 망원동의 휴게소에서 캔맥주를 하나 사 강변을 바라보며 마셨다. 어지러운 세상 얘기는 서로가 금했다. 여유 있는 실존은 어려워도, 게으른 관조는 가능한 게 아닌가. 땀 흘리는 희열을 회복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월요일이면 혜화동의 오래된 모교의 음악실을 찾았다. 그곳에서 이제는 낯설어진 악보를 복기하며 노래를 불렀다. 환갑이 가까워진 선배가 이젠 한 시간의 합창연습도 힘들어 하고 말했다. 시간이 더디게 간다는 것이다. 악보 속의 사성부를 발성하는 단원들의 머리는 백발부터 병사의 까까머리까지 다양했다. 기자와 트럭운전사, 문학평론가와 제약회사 직원이 발성하는 하모니는 아름다웠다. 10대에 시작한 남성합창의 추억이 그들을 이 자리로 끌어당겼다. 즐거운 인생은 아닐지라도, 그들의 성대가 뿜어내는 소리는 의연했다.
자전거를 타면서 몸이 배우는 것은 균형감각이다. 그것은 닭 가슴살 먹으며 울퉁불퉁한 근육을 살찌우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남성합창단의 베이스 단원이 몸으로 배우는 것은 미묘한 리듬의 변용과 성부가 다른 음들을 포개는 데서 가능해지는 조화다.
그러나 노동의 공간에서 이 침착한 쾌락의 내면화는 허용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생존에 강박된 노동에 대한 공포는 정규직 여부를 떠나, 인간됨의 유력한 표지일 관조와 성찰을 차단한다. 오로지 생존만이 문제가 된다면, 우리는 이미 지옥의 문 앞에 와 있다.
문화는 사치스러운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자전거를 타면서도 굳이 신발부터 헬멧, 고가의 미끈한 운동복을 사서 떼 지어 라인을 질주해야만 성미가 풀리는 사람들의 대열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렇게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우측통행 안 한다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자전거를 타는 풍경은 한강에서도 흔한 것이다.
문화는 사치스러운 것일까. 아닐 수도 있다. 자전거를 타고 온 젊은 부부가 망원동의 잔디밭에서 맥주를 마시며 소박한 호사를 누릴 시간을 늘리기 위해 우리는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백발의 노인들이 비둘기처럼 거리를 배회하지 않고 낡은 음악실에서 악보를 넘겨가며 정확한 음정을 발성하기 위해 애쓰는 데서 회복되는 것은 인간됨의 품위다.
자전거 페달을 돌리는 일이나 절대음감을 회복하기 위한 반복적인 발성에서 공통적으로 훈련되는 것은 들숨과 날숨이다. 그러나 이 예외적인 호흡의 리듬과 도시에서의 생존의 리듬은 화해하지 못하고 따로 논다. 그러나 페달은 돌리라고 말하고, 성대는 울리라고 권유한다. 몸의 호소를 경청해야 한다.
이명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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