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7.31 19:37
수정 : 2009.09.14 17:32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
한 달 남짓 영국 여행을 다녀왔다. 한 명의 음악 애호가로서 대중음악 1번지 영국을 꼭 가보고 싶다는 오랜 숙원을 이뤘다. 공연도 많이 봤지만 여러 도시를 돌아다녔다. 런던과 에든버러, 리버풀과 맨체스터, 브리스틀, 그리고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을 방문했다. 영국 대중음악사에서 중요한 흐름이 발생했던 도시들이다. 그 도시들을 직접 방문해서 왜 그때 그런 음악들이 생겨났는지를 몸으로 느껴볼 작정이었다. 안 느껴지면 어떻게든 현지인들을 붙잡고 따져 물어보기라도 할 각오였다.
그러나 작정과 각오는 필요 없었다. 여행의 본격적인 시작은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이었다. 다큐 <글래스턴베리>로도 잘 알려진 이 페스티벌은 세계 최대의 음악축제다. 아니, 그냥 종합축제다. 장르를 불문한 모든 음악은 물론이고, 마임부터 서커스까지 공연이란 형태로 벌어지는 모든 이벤트가 거기 있었다. 걸음걸음마다 넘치는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보면서, 15만명의 인파를 보면서 영국 대중문화의 압도적인 힘을 뼈저리게 느꼈다. 런던의 첫인상은 지저분하고 탁했다. 그러나 채 하루가 되지 않아 그 안에 빼곡히 들어찬 문화 콘텐츠들에 압도되고 말았다. 특히 가난한 젊은 아티스트들이 몰려 있는 이스트 런던에서 마주치는 온갖 새로운 형태의 음악과 전시에, 모든 멋진 것은 변방에서 시작된다는 말을 절감했다. 도시 전체가 ‘아서왕’ 세트장 같은 에든버러는 왜 스코틀랜드 출신의 음악인들이 그리도 서정적이면서도 경쾌한 음악을 만들어내는지 단박에 깨달음을 줬다. 맨체스터의 좁은 시내를 벗어나면 곧 쇠락한 변두리가 드러난다. 1970년대 후반, 자본주의의 요람에서 자본주의의 무덤으로 몰락했던 때의 시간이 그대로 멈춰 있는 느낌이었다. 하루아침에 몰락한 노동자 계급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음악밖에 없었다. 그래서 맨체스터의 음악은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영국을 지배할 수 있었다.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리버풀 교외는 마치, 영원히 60년대의 모습을 간직할 각오를 보여주는 듯 평화롭기만 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은 ‘페니 레인’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 같은 비틀스 노래들이 왜 만들어졌는지 설명이 필요 없었다.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 지역의 공기와 분위기가 그 도시의 음악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뭐랄까, 마치 농작물처럼 음악이 땅에서 열린다는 느낌이었다. 가장 지역적인 음악이 가장 독창적인 음악이 되고 그 독창성이 영국을, 그리고 세계를 제패했다. 각 지역마다 문화적 인프라가 존재했고 이를 발굴해서 소개하는 미디어와 산업, 그리고 지역에서의 문화 현상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존재했기 때문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쯤 되면 ‘우리도 언젠가는…’이란 결의가 생겨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서울, 그것도 홍대 앞을 제외하면 라이브 클럽의 개수를 꼽는 데 열 손가락이면 충분한 한국의 현실이 그 즉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문화의 다양성을 부르짖는다. 공허하다. 밭이 오직 한 곳뿐인데 어찌 여러 종의 작물을 거둘 수 있으리. 과실을 탐하기 전에, 밭부터 갈아야 하는 건 농사나 문화나 마찬가지일 텐데.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