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8.21 20:22
수정 : 2009.09.14 17:29
|
최성각 작가·풀꽃평화연구소장
|
‘철근이’와 ‘구리’는 시골에서 내가 키우는 거위 이름이다. 이름을 붙여주기 전에는 날지 못하는 그저 하릴없이 뒤뚱거리는 하얀 새일 뿐이었다. 우리 식문화에서는 고기도 별로고, 겨우 두 마리 거위털로는 아무것도 못 만드는 그저 무용의 집짐승일 뿐이다. 단지 드물다는 것이 이 녀석들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드높일까.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세상을 뒤덮고 있는 능률과 실용의 정신으로 볼라치면 이 녀석들은 무용하다. 그런데도 이 녀석들은 연구소 마당을 정신없이 환하게 만들고, 급기야는 그 장소에 눈부신 광택을 부여해 갑자기 의미 있는 공간으로 변화시키곤 한다. 이를 일러 ‘무용의 용’이라 하는가 모르겠다.
부드럽고 연약하면서 민감하기 짝이 없는 거위 두 마리가 철근이와 구리라는 메마르고 견고한 쇠붙이 이름을 갖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그것은 이 녀석들보다 먼저 2년을 같이 산 ‘맞다’와 ‘무답이’ 때문이다. 맞다는 오래전 우리가 새만금 살리기 운동에 몰두해 “멀쩡히 살아있는 갯벌을 꼭 방조제 쌓아 죽여야 하는가” 하고 탄식할 때 “맞아요, 맞아” 하고 괙괙, 화답했다. 그래서 ‘맞다’가 되었고, 다른 한 놈은 묵묵부답이어서 ‘무답이’가 되었다. 맞다와 무답이는 두 번씩이나 봄꽃이 피었다 지는 것을 보았고, 여름철마다 털갈이를 했고, 낙엽이 떨어지고 눈이 내리는 것을 같이 봤다. 그러던 어느 늦봄에 수리부엉이로 짐작되는 날짐승에게 습격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 40년을 산다기에 나보다 더 오래 지상에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겨우 2년간 이 세상에 머물다 갔다. 십장생과 산다 해도 사고는 일어날 것이다.
슬픔을 잊기 위해 얼마 후 다른 거위들을 만났다. 그러곤 어떤 맹금류의 발톱도 파고들지 못하게 쇠붙이 이름을 붙여주었다. 수리부엉이뿐 아니라 멧돼지도, 오소리도, 들고양이의 발톱도 이 애들의 가녀린 몸에 침입하지 못하게 단단하게 단도리를 해준 것이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름을 붙이는 순간, 거위의 일과 나의 일이 무관하지 않게 된다. 내가 부르고, 녀석들이 화답하는 순간, 이 호혜적 관계는 설명할 수 없는 고리에 의해 녀석들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햇볕 환한 한낮에 풀숲을 천천히 뒤뚱거리며 철근이와 구리가 중얼거리듯 낮은 소리를 낼 때 뜰은 말할 수 없이 평화로워진다. 비 그친 오후, 날개를 활짝 펼치고 마당을 가로질러 달릴 때 그 순결한 기쁨의 몸짓은 형언하기 힘들게 아름답다. 정성껏 부리로 몸을 씻고 외다리로 오수에 빠지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철저하게 즐기는 철근이와 구리는 쉽게 분해되는 얼마간의 거위똥과 바람에 날리는 깃털 외에는 세상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 존재방식이 너무나 가볍다. 인간이 거위나 짐승들에게서 배우는 것 중의 절정이 바로 거기 있다. 그들은 자연을 개조하려고 하지 않는다. 개선도 개악도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살아있다는 벅찬 경탄에 감사하기는커녕 늘 타자와 비교하면서 이미 넉넉하건만 더 풍족한 상태를 욕망하는 인간은 그 순간 부끄러워진다. 잘 흐르는 강에 ‘검은 손’을 대려 하고, 땅속의 것들(석유)을 지상에 꺼내 모조리 태우고, 바다를 쓰레기장으로 사용하는 존재는 지상에 오로지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최성각 작가·풀꽃평화연구소장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