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8.28 20:04
수정 : 2009.09.1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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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옥섭 한국문화의 집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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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율이 흐르자 여든여섯 살 노명인이 지팡이를 놓고 걸어 들었다. 외씨버선에 밟힌 화문석에서 동심원으로 물결이 번졌다. 피리며 대금에서 뿜는 털 하나 안 빠지는 소리에도 급소가 있었는지 파고들어 꽉 밟고 요지부동으로 서 버리는 순간, 얼씨구! 추임새가 절로 터졌다. ‘서 있기만 해도 춤이 된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지난 7월26일 국립국악원에서 열린 조갑녀 명인의 춤판에서 벌어진 기적이다.
공연이 끝나고 선생이 계시는 사당동 따님의 집을 찾았다. 이제 다시 남원으로 돌아가려고 짐을 챙기는 중이었다. 가장 소중히 챙기는 물건이 선생의 어머니가 만들어준 버선이었다. 만져 보니 버선의 앞은 솜버선, 뒤꿈치 부분은 홑버선이었다. 아! 이것이 고수의 비결이었구나. 순간 찌릿했다.
같은 전통춤이라도 선생은 뒤꿈치에 중심을 두고 춘다. 보통은 발 앞쪽에 중심을 두는데 선생은 반대에 두는 것이다. 앞발에 중심을 두면 상하좌우로 움직임이 거침없다. 반면 선생처럼 중심을 뒤꿈치에 두면 둔해진다. 게서 움직임을 만들어야 하니 좌우보다 상하의 움직임에 주력한다. 물론 그마저 앞발 중심에 비해 현저히 작다. 그러니 간신히 얻어낼 수 있는 미동을 잘게 나누어 편차를 만들어야 한다. 딛고 설 때 살갗이 닿는지, 살이 닿는지, 뼈까지 닿는지 뒤꿈치는 지극히 예민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앞발은 솜버선을 신고 그 위에 홑버선을 꽉 끼게 신어 유선형의 외씨를 만들어야 한다. 치마 끝에 살짝 보여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앞은 솜버선, 뒤는 홑버선이라는 자신만의 버선을 고안해 ‘유혹’과 ‘절제’를 한 켤레로 감당한 것이다. 얇은 뒤축이 주축이 되어 정지된 속에 움직임을 불어넣어 ‘서 있기만 해도 춤이 된다’는 춤의 전설을 실현하게 된 것이다.
공연한다고 딸네 집에 와 있던 얼마간이 봄날이었다. 이제 남원으로 내려가면 춤은 물론이요 그 좋은 판소리와도 작별이다. 사시는 고향 남원은 국악의 본향이건만 정작 선생에겐 국악이 불편하다. 엔간한 남원 사람이면 다 아는 “춤은 조갑녀”란 옛 명성 때문이다. 사람들이 찾아들면 그 사람 아니라고 손사래를 쳐 왔는데, 울안에 국악소리 낭자하면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자백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예기(藝妓)였던 과거가 드러나 자손들이며 사돈들, 아는 모두에게 폐가 되니 큰일이다. 그저 유행가를 틀어두고 들키지 않게 사는 것이다. 어찌어찌 곡절 끝에 한바탕 춤도 추고 신문에도 났지만, 사는 것마저 터놓고 살면 더 많은 것을 물어 올까 봐 춤추던 기억을 어금니로 깨물고 있다.
짐을 챙기던 따님이 다시 버선을 건네받으며 죽으면 같이 묻어 달라 했다고 말했다. 순간 또 찌릿했다. 아! 또 이렇게 떠나 버리겠구나. 선생은 구한말 고종 앞에서 춤을 추어 옥관자를 받았던 명무 이장선(1866~1939년)의 마지막 제자다. 스승의 춤을 물려받아 버선을 고쳐 가며 완성한 절묘한 춤은 후계가 묘연한 것이다. ‘춤속’은 좋으나 문화재라는 ‘실속’이 없기에 배우려 들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이대로 수수방관한다면 버선과 함께 흉곽을 드르륵 열고 심장을 덥석 쥐던 다시없는 춤을 묻을 것이다.
진옥섭 한국문화의 집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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