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9.11 19:09
수정 : 2009.09.14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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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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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씨는 창밖 큰길에서 들리는 공사의 소음에 잠을 깼다. 아침 7시. 아직 잘 시간인데 일어났다. “탈출하자! 북촌으로 가자!” ㅇ씨는 3년 전 서울 북촌의 남쪽 끝 큰길(안국역에서 창덕궁 가는 길) 건너편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북촌으로 가려 했지만, 집을 구할 수 없었다. 그때만 해도 길 이쪽과 저쪽의 소음 차이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 그 길에서 수개월 전부터 고궁 길 정비 공사가 시작됐다. 벽돌만 한 보도블록을 걷어내고, 큰 돌을 가져다 현장에서 그라인더로 잘라 조립하듯 맞춰 끼웠다. 소음이 컸고 돌 먼지도 많이 날렸다.
ㅇ씨는 북촌으로 들어섰다. 한옥과, 이런저런 유적이 있지만 그에게 북촌의 매력은 다른 데 있다. 높은 건물이 없어 어디서든 하늘이 시원하게 보이고, 사각형 블록 구조가 아닌 꼬불꼬불한 골목길과 언덕길이 정겹고, 서울 한복판임에도 시골 소도시에서나 볼 법한 치킨집, 꽃집, 세탁소, 소아과 병원이 버젓하게 들어서서 사람 사는 냄새를 물씬 풍긴다. 그의 눈엔, 다른 사람들도 같아 보였다. 그들은 북촌에서 특별히 꾸며놓은 어떤 것을 찾기보다 자연스럽게 남아 있는 서울 ‘동네’의 모습을 즐기는 것 같았다. 이곳엔 고향과, 시간과, 기억이 남아 있다. 그건 누가 만든 게 아니다. 다른 걸 만들지 못하게 해서 남아 있게 된 거다.
가회동 길 따라 감사원으로 올라가면 남동쪽으로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평균 키의 남자가 평균 키의 여자를 내려다보는 정도의 각도다. 고층 아파트에서 풍경을 장악하듯 내려다보는 것과 다르다. 저기서도 여기를 올려다볼 거다. 평화롭다. 이 길엔 가로수가 소나무다. 도로도 90년대에 넓혔다. 그땐 시끄러웠겠지만 지금 보면 좋지 않냐고? 이런 게 문제다. 조금씩 양보하다 보면 결국 사라진다. 하지만 당시엔 모른다. 당장의 불편함, 촌스러움이 더 눈에 띌 수도 있다. 게다가 땅은, 공간은 돈이기도 하다. 실제로 3년 전부터 북촌 땅값이 부쩍 올랐고, 정릉에서 북촌으로 지하 터널을 뚫는다는 발표도 나왔다. ㅇ씨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편안한 풍경 이면에 이해관계와 돈 계산으로 전운이 감도는 것처럼 보였다.
ㅇ씨는 안국동 로터리로 돌아와 횡단보도 앞에 섰다. 건너편 인사동 입구를 보니 공사가 마무리돼가는 듯했다. 그의 기억에 인사동 길이야말로 공사 안 할 때보다 할 때가 많았다. 최근 공사는 유달리 길었다. 길바닥을 다시 깔고 초입의 벤치를 없앴다. 모퉁이에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수십년 된 은행나무들을 밑동부터 잘라내고 보도블록으로 덮었다. “이건 또 얼마나 갈까?” ㅇ씨는 광화문에서 피맛골 거쳐 인사동을 잇는 물길을 낸다는 보도를 떠올렸다. 조만간 또 인사동에 공사가 시작될 거다.
“의욕 많은 성형외과 의사의 눈엔, 많은 사람의 얼굴이 환부로 비칠 거다. 의욕 많은 정치인과 행정가의 눈엔, 서울 곳곳이 환부로 비칠 거다. 그런데 사람이 맨 얼굴로 있는 시간보다 붕대 감고 있는 시간이 더 길다면 그 삶이 행복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 백명 가까이 모였다. 최근 들어 안국동 일대에 신호 통제가 잦아졌다. 한 미국 영화가 떠올랐다. 보행신호가 하도 안 떨어지니까 주인공이 “여러분, 여기는 뉴욕입이다”라며 사람들 선동해서 무단으로 건너가는 장면이었다. ㅇ씨도 잠깐 입을 뗐다. “여러분, 여기는 서울…” 하는데 옆의 여자가 겁먹은 표정으로 본다. 그는 속으로 뇌까렸다. “서울 사람들 성질 급한 것 같으면서도 참 잘 기다리는구나. 나도 기다리자.”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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