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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0.16 21:15 수정 : 2009.10.16 21:15

김동욱 경기대 교수 한국건축사 전공

문화칼럼





흔히 ‘6조거리’라고 부르는 광화문 앞 큰길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관찬 사료에서는 ‘6조대로’라고 적었다. 6조거리는 일반인들 입에 쉽게 오르내린 명칭이므로 지금 통용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공식적인 호칭으로는 사료에 근거해서 6조대로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광화문 앞 6조대로는 나라의 여러 가지 행사가 치러지는 장소로 쓰였으며, 행사 때는 도성 주민들이 나와서 구경을 즐겼다. 6조대로가 조성된 것은 조선 왕조의 3대 임금인 태종 때 와서인 것으로 보인다. 4대 세종은 광화문과 6조대로의 위상을 정립한 임금이었다. 세종은 오례의라고 하는 다섯 가지 국가 의례의 종목과 제반 절차를 정비하였는데, 오례 가운데는 광화문에서 거행하는 ‘대나의’나 ‘취각령’ 같은 군사 의례가 들어 있다. 섣달그믐 전날 밤에 악귀를 쫓아내는 의식인 대나의식이나 유사시를 대비해 군사의 명령 체계를 전달하는 연습을 하는 취각령의 중요 행사 지점이 광화문이었다. 중국 황제의 서신을 받는 의식이나 왕실의 혼례와 같은 가례 의식이 있을 때도 광화문은 중요한 통과 지점이었다. 이런 행사가 있을 때 6조대로에는 오색 종이나 비단으로 가로변 건물이나 문을 장식하는 결채를 하였고 간혹 나무로 단을 만들고 여기에 각종 꽃이나 오색 비단을 장식하는 채붕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대로에는 도성 주민들이 구경을 나와 연도를 가득 메웠다. 다른 국가 의례가 종묘나 궁궐 안같이 주민들이 바라볼 수 없는 폐쇄된 공간에서 치러진 데 비해서 광화문과 6조대로의 의식은 주민들에게 개방된 열린 의식이었다. 광화문 앞 6조대로는 도성의 가장 상징적인 가로였다고 할 수 있으며 세종은 그런 의례를 제정한 군주였다.

6조대로는 종종 무관을 선발하는 과거시험장으로도 쓰였다. 세종은 무과시험 때 광화문 밖에 장막을 치고 나와서 시험 진행을 지켜보았다. 시험 과목에는 무술과 근력을 측정하는 시험이 있었는데 250보 달리기, 두 손으로 각각 50근짜리 모래주머니를 들고 100보 달리기 같은 종목이 있었다. 시험 과정은 도성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졌다. 6조대로는 도성의 가장 활기 넘치는 장소였다.

16세기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되고 250년 동안 궁이 빈터로 남으면서 6조대로의 위상도 추락했다. 광화문이라는 구심점을 잃은 6조대로는 아무런 의식이나 행사도 치러지지 않은 채 빈 공간으로 남았다. 다행히 19세기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대로는 옛 모습을 회복했지만 곧이어 들이닥친 외세의 침략으로 6조대로는 외국 군대의 행렬이 지나가는 길이 되었다.

이제 다행스럽게도 6조대로가 시민들의 광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번 한글날을 기념해서는 세종대왕 동상이 대로 한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세종의 동상이 여기에 세워지는 것은 길 한쪽에 세종의 이름을 딴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섰기 때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따른 셈이 되었다. 이 공간을 단순한 시민 광장이 아닌 역사적 상징성을 지닌 장소로 만들어 나가는 일은 앞으로의 과제일 터인데 그 첫걸음은 우선 이름부터 6조대로라는 본래 것으로 되살리는 일일 것이다.

김동욱 경기대 교수 한국건축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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