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1.20 18:56
수정 : 2009.11.20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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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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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영화가 있다면 프랑스 영화가 있다. 프랑스 영화란 말보다는 불란서 영화란 표현이 더 어울린다. 불란서 영화 속 인물들의 대화는 늘 서늘하면서도 어딘지 우울한 게 매력적이다. 우리네 인생의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끔찍한 모순과 아이러니, 비루함이 마구 묻어나는 대사 행간에는 인간 존재의 근원성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그 심연 같은 바닥을 들여다본 자들의 차가운 눈들이 반짝인다. 지독하고 더러는 덧없고, 마구 망가지고 싶다는 느낌과 견딜 만하다는 자괴감이 살을 섞는 듯하다.
그런 불란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사라문의 사진전(29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브이갤러리)을 보았다. 그의 사진은 묘한 슬픔과 덧없음이 분필가루처럼 묻어난다. 손가락 어딘가에 오래 묻어서 잘 지워지지 않으면서 더럽다거나 혐오스럽지는 않은, 그저 부득이 안겨진 상처나 추억 같다. 사라문의 사진은 기존 현대 사진과는 무척 다르다. 그럴듯한 개념이나 현대 사진을 구축하는 여러 논리들과도 거리가 멀다. 마치 박수근이나 장욱진의 그림을 보았을 때처럼 그 이미지를 만든 이의 개인적 체취와 정서가 ‘확’ 하고 그냥 안긴다. 그 사람의 인성이, 그가 본 피사체에 대한 느낌과 정서가 가감없이 적셔져 있다.
예술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이 지구상에 누구도 아닌 오로지 한 개인만의 감수성과 감각이 절여져 있는 어떤 상징, 기억 등일 것이다. 몽환적 색채로 다가오는 피사체는 현실계에 존재하면서도 무척 비현실적이다. 사진인지 판화인지, 혹은 회화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슬로모션으로 무중력 상태를 거닐듯이 혹은 가물가물 사라지기 직전에 겨우 포착되어 홀연 멈춰선 어떤 순간을 꿈처럼 안긴다.
사진은 단지 외부 세계의 객관적 재현에 머물지 않는다. 회화가 인위성에서 출발한다면 사진은 카메라의 자동성에 기초한다. 이러한 자동성이 사진으로 하여금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게 만든다. 사진을 통한 지각은 눈으로 세상을 지각하는 것보다 현실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카메라는 인간의 지각 구조와 닮았으면서도 개념이나 관습에 덜 얽매여 있다. 오히려 카메라의 눈이, 인간이 부득이 지니고 학습받아 체득한 표상과 관습, 도식의 지배를 받는 우리의 사고에 새로운 충격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들뢰즈가 생각한 사진의 힘이다. 사라문의 사진은 그런 한 예다. 사진은 인간이 보고 느낀 것을 예기치 않게 무의식중에, 갑자기 드러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사는 파리의 이곳저곳을 찍었고 모델들의 몸을 찍었다. 그 대상들은 한결같이 정확성에서 비켜나 있다. 흘러가는 이미지이자 덧없이 소멸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이미지들이 오히려 상상력과 관자의 참여를 독려한다. 사라만의 감수성과 감각, 직관으로 현실을 다시 보여주고 깨닫게 해준다. 오늘날 사진이 상실한 것들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은 보는 이의 감성을 일깨운다. 모든 목적성을 지운 자리에 홀연 자신이 접한 세계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나 본,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보지 못한 세계 말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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