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1.15 21:05
수정 : 2010.01.15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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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봉 한국출판인회의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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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에 눈 덮인 호남평야에 있었습니다. 월조(越鳥)도 남쪽 가지 골라 앉아 운다 하거늘, 세상에서 비켜서거나 돌아앉거나 내려놓을 때 고향만한 곳이 또 있을까요.
팔순에 가까운 어머니가 부산합니다. 이미 부엌살림에서 손 뗀 지 오래지만 손자들과 아들에게 당신의 음식을 먹이고 싶은 것입니다. 참 난감한 시간입니다. 아이들은 할머니 음식이 낯설고 아들인 저 역시 세상의 많은 맛에서 어머니의 맛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부지런히 당면을 삶고 돼지고기를 볶습니다. 제 어머니 필살의 요리입니다. 돼지고기 몇 점에 약간의 시금치와 당근으로 색깔을 맞춘 잡채는 수돗물로 도시락을 대신하던 시절에 내가 만난 최고의 음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소고기와 각종 해물, 표고버섯 등의 고급재료로 만드는 요즘의 잡채에는 많이 민망합니다.
아이들이 딴청을 부립니다. 할머니는 멋쩍게 손자들 앞에 잡채를 밀어놓습니다. 손자들이 건성건성 몇 번 먹는 척하다가 눈치채지 못하게 수저를 내려놓습니다. 어머니의 당혹한 표정을 살피며 제가 접시를 당겨 커다랗게 한 입 넣습니다.
세상에 변하는 게 입맛뿐인가요. 흐르는 세월에 마디는 없을 텐데, 시간에 매듭을 묶고 옛것과 새것을 타자로 만들어 끝없이 새로운 것을 쫓아갑니다. 출판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거셉니다. 전자책, 전자도서관이 낯설지 않고 학생들의 교과서를 시디(CD)로 대신한다 합니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수요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지만 뭔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세상에 뒤처진다는 강박관념과 조급증에 기인한 바도 큽니다.
출판계에서도 뜻을 모아 출판콘텐츠관리회사를 설립하는 등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있지만 걱정이 태산입니다. 전자출판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생각하고 밀려오는 자본들에게서 독과점 없는 유통을 포함해 지식재산권과 출판권을 어떻게 지킬지 걱정입니다. 이를 출판계의 제 밥그릇 지키기 혹은 구태의연한 인순고식이라 폄하할지도 모르지만 책의 그릇이 어떻게 변해도 책을 만드는 본질이 변할 수는 없습니다.
책을 만드는 대한민국의 수천 편집자들은 세상의 모든 지식과 문화를 독자와 함께 나누기 위해 고민합니다. 어떤 책을 어떻게 펴내고 ‘지금 여기’의 의미는 무엇이며 인류의 정신적 진보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등을 저자와 함께 고민하며 한 권의 책을 만듭니다. 이들이 쓰레기 같은 정보와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부터 지식과 교양과 문화를 지키고 견인합니다. 그래서 책은 인간의 방대한 경험과 사색이 정밀하게 정제된, 모든 정보 세계의 근간의 지위를 갖게 됩니다. 따라서 책은 산업이 아니라 정신과 문화로 만듭니다.
잡채를 한 입 물다가 어떤 기억에 코끝이 찌릿합니다. 제가 대여섯 살 무렵, 어머니가 주인집 아주머니로부터 매 맞는 것을 우연히 봤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하루 한 끼도 못 먹던 어머니가 주인집 쌀독에 손을 댄 모양입니다. 매 맞으며 공포와 절망에 떨던 어머니의 눈은 제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만든 잡채입니다. 도둑질을 해서라도 허기를 채워줬던 어머니의 미망하는 삶의 질곡의 맛입니다. 눈물로도 형용할 수 없는데, 안타깝다는 듯 제 마음을 헤아린다는 듯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아이들이 밉습니다. 꿀꺽 삼키는 목을 타고 울컥 뜨거움이 올라옵니다.
한성봉 한국출판인회의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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