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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8.26 19:31 수정 : 2011.08.26 19:31

김별아 소설가

거의 모든 아이들이 앞다투어 쓰노라니
내 귀에는 ‘졸×졸×…’ 시냇물 소리 같다

점심 약속에서 돌아오는 길이 마침 인근 학교의 하교 시간과 겹쳤다. 터진 보자기에서 쏟아진 해콩 같은 아이들로 일순 주위가 떠들썩해졌다. 삼삼오오 무리 지어 팔짱을 낀 계집애들은 종달새처럼 ‘솔’ 음으로 지저귄다. 사내애들은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아 깃발처럼 펄럭거리며 달려간다. 햇살은 따갑지만 바람은 소슬하다. 아무러한 시절에도 이렇게 계절은 바뀌고 아이들은 자란다. 모두가 참으로 예쁘고 사랑스러워 한참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솜털이 보송한 붉은 뺨과 실핏줄이 비치는 말간 살갗, 나풀거리는 아이들의 머리칼에는 하나같이 바닐라 향이나 딸기 향이 묻어 있다. 위태롭기에 더욱 달콤한 성장의 시간.

그런데 굳이 엿들으려 하지 않아도 소란스러워 들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끼리의 대화 사이사이에 왠지 이물감이 느껴진다. 열네댓살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래야 학교와 학원과 어제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연예인에 대한 군소리 따위가 전부인데, 그 모두를 꿰는 이음말이자 추임새가 한결같이 ‘×라’다. 몇몇만 쓰는 것도 아니고 거의 모든 아이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앞다투어 쓰노라니 뒤따라 걷는 내 귀에는 ‘졸×졸×졸×…’ 시냇물이 흐르는 것만 같이 들린다. 좋아도 싫어도 ‘×라’, 맛있어도 멋있어도 슬퍼도 아파도 ‘×라’ 그렇단다.

이미 연구 결과는 ‘청소년의 73.4%가 매일 욕설을 사용’하고 ‘욕설을 쓰는 청소년 중 58.2%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 처음 시작’했다는 보고서를 내놓고 있다. 그리고 입을 모아 천박하고 폭력적인 언어 환경으로부터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언어 순화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성토한다. 그런데 그 훌륭한 어른들께서는 어린 시절 단 한 번도 욕을 하지 않은 착한 아이셨는지 모르지만, 별로 착하지 않은 아이였던 나는 지금 욕한다고 욕먹는 아이들이 낯설지 않다. 우리 때는 ‘×발’을 주로 썼는데 요즘은 ‘×라’가 대세인 것이 다를 뿐이다. 다만 문제는 우리 때의 욕이 비 올 때 떨어지는 낙숫물 정도였다면 지금은 마르나 궂으나 졸졸 흐르는 시냇물 같다는 것이다. 청소년 세대에 유행처럼 욕설이 번지는 이유를 그들 또래인 아들아이에게 물으니 두 번도 생각 않고 대답한다.

“습관이지!”

하지만 어떤 아이도 “기저귀가 젖어서 ×라 불편해!”라든가 “이 이유식은 ×라 맛있어!”라고 말하며 크지 않는다. 말은 사회적 표지이기에 특정한 말의 범람에는 사회적 원인이 없을 수 없다. 기실 그들의 시기에 내가 욕을 했던 이유는 강하게 보이고 싶어서였다. 거칠다는 것과 강하다는 것을 혼동했기에 거친 쌍소리를 쓰면 강해진 듯한 착각에 우쭐했다. 지금 아이들의 욕설 문화 역시 또래 집단 내에서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경쟁적인 과시의 측면이 있다. 그런데 실은 강해 보이고 싶다는 것 자체가 턱없이 약하다는 증거다. 청소년기를 관통하는 심리는 한마디로 ‘불안’이다.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 나만의 나를 지키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무력감과 통제에 대한 거부감으로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가시를 돋우는 것이다.

정작 그 욕의 망측한 뜻을 아는 아이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더 많은 아이들이 욕으로나마 자신을 방어하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이 그들의 불안을 부추기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철저히 서열화한 학교와 무자비한 학원 사이를 뺑뺑이 돌며 아직도 ‘맞을 만한 짓’을 하기에 때려야겠다는 어른들의 으름장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자해적인 무기인 욕이라도 없다면 무엇으로 불안과 맞선단 말인가? 파김치가 되어 학원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들이 누구에게인지 모르게 나지막이 내뱉는 ‘×라’ 소리가 숨통을 틔우려는 마지막 절규처럼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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