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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9.23 19:23 수정 : 2011.09.23 19:23

김별아 소설가

이웃 학교의 자살 사건도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말했다

교사의 딸로 태어나 자라는 동안 나는 절대 교사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당위와 설교로 타인의 삶에 관여하는 일은 깜냥도 되지 않거니와 질색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도 꼰대가 되어 가는지, 어쩔 수 없는 유전자의 작용인지 활자를 통한 고독한 소통과는 다른 눈맞춤과 대화에 쏠쏠한 재미를 느끼던 터인데….

늦더위가 용을 쓰던 지난 토요일, 수도권 새도시 중 서울 강남 못잖게 교육열이 높다는 지역의 이른바 ‘명문’ 중학교에서 최악의 경험, 아니 최고의 가르침을 얻었다. 재량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반을 지원한 아이들을 만나 말로만 듣던 ‘교실 붕괴’를 직접 체험하게 된 것이다. 인사를 나누기 전부터 아이들의 절반은 스마트폰에 코를 박은 채 고개를 들 줄 모르고, 나머지 절반은 끼리끼리 숙덕거리거나 정신없이 돌아치거나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난장판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그야말로 ‘개판’으로 치달아갔다.

“쟤네는 포기하고 우리끼리 수업해요!”

여학생 대여섯이 가방을 싸들고 앞자리로 옮겨왔다. 그런데 포기당한 채 날뛰는 아이들만큼이나 포기하자며 다가온 아이들이 기묘했다. 철저히 냉소적인 그들의 표정은 이런 상황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괴롭고 싫다면 하지 않는 편이 더 ‘교육적’이라고 믿는 나는 문학 강연이고 나발이고 제쳐두고 아이들에게 운동장에서 뛰어놀거나 마음껏 노닥거릴 자유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괴발개발 그린 보고서를 내던지고 신나서 달려나간 사내아이들은 곧 풀죽은 얼굴로 잡혀 들어왔다. 어떻게든 정해진 시간까지는 교실 안에 잡아둬야 한다는 ‘방침’ 때문이었다.

“얘들은 그나마 상태가 좋은 편이에요.”

황희 정승은 미욱한 일소 앞에서도 흉보는 일을 경계했거늘, 교사는 아이들이 듣고 보는 가운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모두가 서로를 귀찮아하고 있었다. 이 괴상한 무기력과 무례가 화난다기보다 당황스러워 아이들 사이를 파고들어 말을 걸어 보았다. 형편없는 성적표를 보고 아버지가 홧김에 그만두게 했다는 아이와 농인지 진인지 빙글거리며 집안 형편이 어려워 못 간다는 아이를 제외하곤 모두가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심지어는 일주일 내내 종합반을 듣는 아이도 있었고, 집에서는 학원(학교가 아니다) 숙제를 하지 않으면 텔레비전을 보거나 게임하는 것이 전부라고 했다. 아이들은 이웃 학교에서 있었던 자살 사건도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말했다. 왕따를 당하던 아이는 옥상에서 몸을 던졌고 가정환경을 비관한 아이는 목욕탕에서 목을 맸지만 자기네 학교에선 아직 한 명도 자살하지 않았다고 자랑했다. 무엇이 다르냐고 물으니 킬킬대며 대답한다.

“우린 좀 독하거든요!”

학교를 대체한 학원에서 너무 많이 공부한 아이들은 더 이상 배우고 싶은 게 없다. 만약 체벌로 세워질 ‘교권’이 있다고 해도 기대와 희망까지 강제로 불어넣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 말마따나 ‘내가 중학생 아이를 키워봐서 아는데’, 그들에게 학교는 여전히 중요하다. 인간관계를 맺고, 갈등을 조정하고, 성취와 좌절을 경험하고, 질서와 부조리를 동시에 체득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학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 없이 학교는 없다. 그곳은 다만 잘 지어진 사육장일 뿐이다.


교문을 나오노라니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 중대형 아파트 숲에 현기증이 났다.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좋은 학군과 유명 학원에 열을 올릴 ‘어른’들을 생각하니 아이들처럼 으르렁거리며 한시바삐 학교로부터 멀리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다. 시험에선 항상 처음 찍은 것이 정답이다. 나는 가당찮은 선생이 아닌 천생 학생 체질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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