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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04 19:23 수정 : 2011.11.04 19:23

김상수 작가·연출가

결정적으로
그의 정체성을
드러낸 건물,
‘남영동 대공분실’

이 글은 고인인 건축인 김수근의 윤리나 과오에 대한 문제제기 차원이 아니다. 그가 정작 ‘건축가’인가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그의 실체를 모른 채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계속 떠받드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태도에는 이제 제동을 걸어야 한다.

‘인권도시 광주’에 다녀왔다. 신축 ‘광주문화재단’ 건물 옆, 재단이 관리하는 ‘김수근 아트 스페이스’라는 명칭의 큰 간판을 내건 건물. ‘김수근’, 이름 석자가 과연 ‘인권도시 광주’에 합당한가? 틀렸다, 이건 아니다. 피 흘리며 민주주의를 사수했던 영혼들을 욕되게 한다.

이는 ‘광주문화재단 사람들’은 물론이고, ‘김수근’이란 이름을 들어본 많은 사람들, 심지어 건축계에서도 김수근의 정체를 몰라서 초래된 사례다. 내가 의문으로 제기한 ‘김수근 아트 스페이스 명명 배경’에 광주문화재단 쪽도 이런 답변을 보내왔다.

“한국 현대건축의 대표적인 1세대 건축가, 자연과 인간의 조화, 한국 건축 정체성을 찾는 증인, 빛고을 시민문화회관 별관(구 전남도체육회관)은 광주시에 유일한 ‘김수근’ 작품, 건축물 보존 재활용 가치 제고, 문화관광 명소로 크게 기대, ‘김수근’ 명칭 사용 필요 판단.”

그럴 수 있다. 김수근에 대해서 알되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수근이야말로 반민주·반인권의 독재정권에 협력하면서 자신의 건축적 성과를 이룬 건축인이다. 대표적 건축인 88올림픽 주경기장,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만나 지은 워커힐호텔 힐탑바, 서울 남산 한국자유총연맹 자유센터와 타워호텔, 육사 교훈탑, 인천상륙작전기념관, 대법원, 치안본부 등 그의 대형 설계 건축물은 많다. 급기야 대규모 국가건설기획을 전담했던 개발독재정권의 ‘한국기술개발공사’ 대표이사도 했다.

결정적으로 그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 서울 용산의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이다. 전두환 말기 경찰의 폭행과 물고문으로 죽임을 당한 서울대 학생 박종철 열사(당시 23살)의 사망 현장, 김근태 민주당 고문이 1985년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게 전기고문을 당한 숱한 민주인사들의 고문현장. 이 건물은 고문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구조로 돼 있다. 7층짜리 건물에서 고문실이 있는 5층만 유독 창문이 아주 작게 설계되어 있다. 끌려온 이들은 길고 어두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어긋나게 배열된 문들을 지나 철문으로 들어갔다. 공간 전체가 이미 인간의 의식과 의지가 무너져 내릴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폭력적인 건물구조 설계였다.

‘김수근’ 이름을 내세워 “문화관광의 명소로 크게 기대”한 광주시는 당장 건물 이름을 고쳐야 한다. 건물을 부술 필요야 없겠지만, 과연 그 이름을 내세우는 게 합당한지는 따졌어야 옳다. 81년 당시 주한 미국대사 워커를 서울 인사동 기생집 ‘동원’에서 전두환 쿠데타의 실세 허화평·허삼수에게 소개한 이도 김수근이다. 군부독재집단과의 내밀한 연관을 본다.

일본 신사를 연상시켜 왜색 시비를 부른 옛 부여박물관을 비롯해 그가 설계한 건물들이 정말 한국의 정조(情調)에 기반을 둔 것인지도 다시 봐야 한다. 더하여 나는 그가 제정신을 가진 ‘건축가’였는지도 의심한다. 그가 지은 반공 이데올로기의 상징인 서울 남산 ‘자유센터’의 도로변 긴 석축의 석재는 조선시대 도성인 서울성곽(사적 제10호)의 성벽을 뜯어다가 사용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조 5년(1396) 1차 도성 축조 당시 경상도민이 축조한 구간인데, 자유센터 축대에 사용된 석재 중에 ‘경주시’(慶州始)와 ‘강자 육백척’(崗字 六百尺)의 각자(刻字)가 있어 이를 증명한다. ‘건축가’ 이전에 지식인으로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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