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01.05 19:19 수정 : 2012.01.05 19:19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양혜왕이 맹자에게 자신은 이웃나라 군주들과는 달리 흉년이 들면 백성들을 흉년이 들지 않은 곳으로 이주시키거나 곡식을 보내어 그들을 돌보아 주었는데 이웃나라의 백성이 줄지도 않고 자신의 백성이 더 늘지도 않는 까닭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맹자는 전쟁터에서 병사들이 도망을 치는데 오십보쯤 도망가서 멈춘 병사가 백보쯤 도망가다 멈춘 병사를 비웃는다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맹자는 근본적으로 백성들이 편히 먹고살 수 있는 왕도정치를 해야지 그러지 못하면서 눈곱만한 선정을 더 베풀었다고 하여 자랑할 게 못 된다는 뜻에서 이 ‘오십보백보’를 설파했다. 성현의 지당한 말씀에 고개가 숙여지면서도 요즘 이 말로 정치판을 정리하려는 분위기에 대해서는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여당과 야당이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여도 야도 구태의연하고 부패했으며, 국민은 뒷전이고 정략적인 싸움질에나 골몰한다고 비판한다. 심지어 ‘오십보백보’라고도 하며 속된 말로 ‘도찐개찐’이라고도 한다. 차떼기를 하나 봉투를 받나 뇌물을 먹은 것은 마찬가지이며, 열 명의 장관 내정자가 위장전입을 하고 부동산 투기를 한 정권이나 한 명이 그런 정권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정치에 대한 실망으로 가득한 사회 분위기에 편승해서 나오는데, 실은 그 속에 민주주의 본령인 책임정치를 마비시키는 독침이 숨겨져 있다. 민주정치에서 집권여당은 선거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임기 동안의 공과를 심판받는다. 그 공과는 본질적으로 야당과 비교할 사안이 아니다. 그러나 집권세력의 실정이 너무 커 선거 참패가 예상될 경우, 그들은 야당의 부정적 행태를 부각시켜 정권심판론에 물타기를 시도한다. 예컨대, 집권여당이 잘못하고 있으나 그 대안세력이어야 할 야당도 다를 바 없다는 식의 유권자 의식을 조성하려 한다. 그리고 여당과 야당을 싸잡아 비판하는 정치심판론으로 바람을 잡는다. 정치허무주의를 통해 국민이 집권세력의 국정운영 실적을 놓고 투표하고자 하는 심리를 흐트러뜨리려는 것이다.

정치심판론이 정권심판론을 대신하게 되면 여야 간 인물 경쟁이 부각된다. 선거를 통해 참신하고 능력있는 인물이 정치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나, 이때 인물 경쟁은 자칫 정권심판론을 무력화시키려는 세력의 아바타 노릇을 하기 십상이다. 민주국가에서 선거는 국민이 여당의 국정운영에 대해 평가하고 나아가 상대적으로 나은 비전을 가진 세력을 뽑기 위해 치러지는 것이다. 그런데 ‘오십보백보’ 주장은 이처럼 정권심판론을 유야무야시킨다.

여당과 야당이 정말 ‘오십보’와 ‘백보’의 차이에 불과한지도 따져볼 일이다. 야당에 전근대적인 정치행태가 남아 있고, 더러는 부패경력자들이 끼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쪽은 4대강 사업을 강행하고 무상급식을 반대하며 대결적 남북관계를 고수하며, 다른 쪽은 4대강 사업을 반대하고 무상급식을 찬성하며 평화번영의 남북관계를 주장한다. 한쪽은 사실상 부자감세를 해왔고 다른 쪽은 부자증세를 추진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 차이가 ‘오십보백보’일까? 선관위에 디도스 공격을 가해 국가 기간을 흔들고 권력부패의 악취가 코를 찌르며 집권자의 ‘꼼수’가 시리즈로 드러나는 세력과 야당이 ‘오십보백보’일 수 있나?

설령 ‘오십보백보’라 하더라도 ‘백보’보다는 ‘오십보’의 흠집을 지닌 세력을 선택하는 것이 순리다. 혁명이 아닌 개혁의 시대에 역사발전은 대개 하나씩 고쳐가면서 이루어진다. 작은 차이라도 구별하여 더 나은 정치세력을 택하는 것이 국민의 삶을 낫게 하는 길이다. 물론 누가 ‘오십보백보’를 넘어서는 비전을 지녔는지도 중요하다. 이를 종합해서 국민은 판단해야 한다. 무엇이 틀렸는지. 무엇이 더 나은지. 그리고 둘 다 마음에 안 들 경우라도 포기하지 말고 그중에서 덜 나쁜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그나마 덜 불편해질 수 있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맹자는 난세의 군주가 왕도정치를 하도록 채찍질하기 위해 ‘오십보’와 ‘백보’를 구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나라의 주인이 된 국민은 자신의 삶의 질을 증진시켜 줄 공복을 뽑기 위해 ‘오십보’와 ‘백보’의 차이라도 구별해야 한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이종석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