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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28 18:02 수정 : 2018.01.28 18:59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전문가의 눈에 비친 북한 창군일 변동은 아이러니하게도 김정은의 실용주의적 통치 스타일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자신의 선대가 구축한 불합리한 ‘신성’에 손을 댄 것이 창군기념일 변동이다.

북한이 인민군 창건기념일을 평창올림픽 하루 전인 2월8일로 옮기면서 우리 사회에 파장이 일고 있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평창올림픽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 창군기념일을 옮겼다고 주장하며 이날 핵·미사일 퍼레이드 등 도발적 행동을 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평창올림픽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란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말 가치는 크게 훼손될 것이다.

북한이 2월8일 행사를 어떻게 치를지 두고 볼 일이나, 창군기념일 변동이 평창을 겨냥한 행동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원래 북한군의 창건일은 1948년 2월8일이었다. 그런데 1978년부터 김일성이 청년 시절 중국 안도현에서 조직한 반일인민유격대(북한 표현은 ‘조선인민혁명군’) 결성일인 1932년 4월25일로 창군기념일을 옮겼다. ‘김일성이 해방 후 이 유격대를 정규적 혁명무력으로 발전시켜서 조선인민군을 만들었다’는 주장에 바탕을 둔 변동이었다. 1996년에는 4월25일이 국가 명절로까지 지정되었다.

그러나 2015년부터 북한은 기념일 명부에서 사라졌던 2월8일을 “정규적 혁명무력 건설”일이라며 되살려 기념하기 시작했다. 그 연장선에서 7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들어와서 이날을 다시 창군기념일로 삼고 ‘건군절’로 공표하였다.

사정이야 어떠하든 이번 일로 평창올림픽 전야에 북한군의 대규모 열병식을 보게 되리라는 우려가 커졌다. 동시에 김정은의 호전적인 이미지도 거듭 우리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러나 전문가의 눈에 비친 북한 창군일 변동은 아이러니하게도 김정은의 실용주의적 통치 스타일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1970년대 북한에서는 후계자 김정일의 주도 아래 역사와 제도의 출발점을 김일성 중심으로 서술한 항일시기로 무리하게 끌어올리는 변화가 있었다. 그때 군 창건일도 1932년 4월25일로 소급되었다. 주체사상이 극단적으로 관념화되고 김일성 개인숭배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발생한 일들이었다. 이 시기에 북한의 제도에 스며든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아직도 ‘혁명전통’이라는 신성불가침의 갑옷을 두른 채 곳곳에 버티고 있다. 그런데 김정은이 자신의 선대가 구축한 바로 이 불합리한 ‘신성’에 손을 댄 것이 창군기념일 변동이다. 정상국가를 향한 움직임으로 읽힌다.

사실 북한 사회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김정은의 실용주의적 스타일은 쉽게 발견된다. 예를 들면 배고픈 인민 앞에 ‘강성대국’의 허장성세를 부렸던 김정일에 비해 김정은은 목표가 ‘강성국가’다. 김정일은 선군 정치를 한다며 군인들에게 원수, 차수, 대장 등을 남발하며 계급 거품을 유발했지만, 김정은은 많은 장군들의 계급을 강등해 거품을 뺐다. 그는 경제를 개방하고 농민에게 생산 경쟁 시스템을 도입해서 증산을 독려하기도 한다. 통상 핵심 간부에 대한 숙청이 있게 되면 담당 사업 분야가 쑥대밭이 되는 것이 보통이나, 김정은은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하면서도 그가 주도하던 경제개방 정책만큼은 유지하였다.

관찰자로서 볼 때 김정은은 맹목적 호전주의자라기보다 실리 차원에서 호전주의를 택한 측면이 커 보인다. 그렇다면 호전성의 이면에 자리잡은 그의 실용주의를 활용할 길은 없을까? 이쯤에서 그가 실리 차원에서 체제 안전 담보용으로 핵무기 개발에 집착했다면, 거꾸로 미국으로부터 체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면 반대의 선택도 가능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그는 핵 개발의 또 다른 목적인 권력 공고화를 이미 실현했다. 반면 제재 때문에 자신이 추구하는 경제발전은 가로막혀 있다.

마침 북한은 작년 11월 말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 발사를 끝으로 ‘국가 핵무력의 완성’을 선언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대체로 북한이 아이시비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추가 시험발사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동안 북한의 공식 언술과 핵·미사일 개발 진도는 거의 일치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북한이 ‘엉성하게’ 핵무력 완성을 천명했을까?

협상의 여지를 남겨둔 것은 아닐까? 최근 김정은의 신년사와 평창올림픽 참가를 보면서 부쩍 드는 생각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은 평창이 열어놓은 남북대화 국면을 활용하여 한국뿐 아니라 중·러도 북한 설득에 나서야 하며 미국도 김정은의 실용주의적 성정을 자극할, 비핵화와 맞바꿀 북한 체제 안전보장 카드를 진지하게 마련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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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이종석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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