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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2.03 08:32 수정 : 2010.02.03 08:55

귀신섬 1천명 끌려와…나가사키 원폭때 33명 희생





나가사키 평화공원 한 편에 중국인 희생자 추도비가 있다. 일제 말기인 1945년 8월9일 나가사키 상공 5백m에서 플루토늄형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숨진 중국인들을 애도하기 위한 상징물이다. 이 비는 2008년 7월7일 희생자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됐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루거우차우 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비 뒷면에는 “이 땅에서 원자폭탄에 의해 횡사한 중국인들을 추도하면서 비전과 핵 폐절을 다짐하며 이 비를 건립한다”는 취지문과 함께 3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일본에 끌려와 억울한 죽임을 당한 중국인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비를 세운 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의 정식 명칭은 ‘옛 우라카미형무지소 중국인 원폭희생자 추도비’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평화공원은 옛 형무소 터에 세워졌다. 나가사키형무소는 이사하야에 있고, 우라카미는 그 형무소의 지소에 해당한다. 원폭이 터진 중심지를 뜻하는 폭심지에서 짧게는 100m, 길게는 약 350m떨어진 곳에 있었다. 폭발에 의한 고온과 강력한 폭풍으로 수용자와 직원 전원이 사망했다. 숨진 중국인들은 일본이 본토의 노동력 부족을 매우기 위해 마구잡이로 끌고온 사람들이다. 농사일을 하거나 장터에서 물건을 팔다가 연행된 사람들이 70%이고 나머지는 항일전쟁 중 잡힌 포로들이다.

미쓰비시광업이 1988년 다카시마신사 옆에 세운 탄광 희생자 유령비. 오른쪽 위가 조선인·중국인과 ‘고락을 같이 했다’고 표현해 물의를 빚은 비문이 있었던 자리다.

1944년 나가사키현의 악명 높았던 사키토, 다카시마, 하시마, 시카마치 탄광으로 끌려온 중국인은 1042명에 달했다. 이들은 탄광 안에서도 격리 수용됐다. 대우는 조선인 연행자에 비해 훨씬 열악했다. 중노동에 가혹한 구타가 끊이지 않았고 식사도 아침 저녁 조그만 만두 2개가 지급될 정도였다고 한다. 1945년 사키토에서 27명, 시카마치에서 6명, 도합 33명의 중국인이 치안유지법·국방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우라카미형무지소로 이송됐다. 연구자들은 사건 자체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본다. 수감중 원폭사한 이들의 유골은 1957년 중국인 유골이 송환될 때 함께 보내졌다.

추도비 건립을 주도했던 시민단체들은 이제 비에 새겨진 희생자 명단 가운데 빠진 한 사람의 이름을 넣으려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 행정당국이 형무소 입소 기록이 없다며 원폭 희생자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이 중국인이 경찰서에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고문사를 당했을 가능성도 조사하고 있다.

나가사키/글·사진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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